전문가들 "푸틴, 중국 끌어내려 북한과 관계 개선 추진"
중국 "북러 사이의 일"이라면서도 "북한과 교류·협력 심화" 강조"
북한 '중러 줄타기 외교' 재개 가능성" 분석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동북아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대결 구도가 굳어질지 주목된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한을 확고한 '우군'으로 끌어안는데 데 이어 올해 안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다시 만나 '반미 연대'를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국은 북러 정상회담 논평 요청에 '북러 사이의 일'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북중 관계가 다방면에서 강화되고 있다고 강조하는 등 상황을 주시하는 듯한 분위기다.
◇ 푸틴, 중국 끌어내려 북러 정상회담 추진했나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외교적 고립 심화로 궁지에 몰린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서 구명줄을 찾으려 하고 있다"면서 "러시아가 서방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11일(현지시간) 평했다.
여태 러시아는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에 반대하며 유엔 대북 제재에 동참해 왔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황이 악화하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올해 6월부터 이른바 '대반격'을 개시한 우크라이나군은 느리지만 조금씩 점령지를 수복하면서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연결하는 육상 회랑을 위협하고 있다. 이 회랑은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거둔 몇 안 되는 성과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수십년간 비축해 온 포탄과 미사일 등을 러시아에 제공한다면 러시아군에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북한제 무기를 직접 사용해 본 결과 불량률이 높은 것으로 파악됐지만, 소모전이 거듭되며 양측 모두 포탄 부족에 시달리는 현 상황에선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어서다.
다만, 단순한 무기 거래라면 굳이 체면을 깎아가며 전 세계적 '왕따 국가'인 북한과 정상회담을 할 필요까진 없다는 점에서 푸틴 대통령이 북러 정상회담을 추진한 데는 더 큰 노림수가 있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작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외교적 고립에 시달려 온 러시아는 최근 들어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를 결집해 서방에 대항하는 새로운 진영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아울러 사실상 유일하게 자국 편을 드는 강대국인 중국과도 경제·군사 협력을 강화해 왔지만,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약속받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해 미 국방부 산하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소의 조성민 교수는 8일 뉴욕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북·러의 협력은 중국이 각각 자국 편에 확실히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구속력 있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여태 무시하던 북한과 갑작스레 관계 개선에 나선 데는 '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북한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메시지를 던져 중국을 확실한 자기편으로 묶어두려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꽃놀이패 쥔 북한, 중러 줄타기 외교 재개 가능성
북한 입장에서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은 이익을 볼 지점이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수년간 국경을 폐쇄한 탓에 발생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원조를 받아내는 동시에 외교적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다.
양국 간 군사협력이 북한제 무기 판매를 넘어 위성·핵추진 잠수함·탄도미사일 등 첨단 기술 교류로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각에선 북한이 지금처럼 중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옛 소련 시절처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실익을 극대화하는 행보를택할 여지가 생겼다는 평가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북한을 '전략적 완충지대'로 보고 지원해 왔지만 시 주석과 김 위원장 간의 관계는 그렇게 원만한 편이 아니라고 진단해 왔다.
빅터 차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아시아담당 부소장 겸 한국석좌는 FP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북한에 상당히 양면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지만 북한 외엔 선택지가 없기에 그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한다면 중국은 영향력 유지를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다시 확장하고 경제 협력을 진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분석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러 정상회담은 북한이 중국에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냉전기부터 북한은 언제나 중국과 소련 사이를 오가며 이익을 극대화하는 '진자'(pendulum) 외교를 펼쳐왔다"면서 "현재 일부 그런 외교가 시행되는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동북아의 신냉전 기류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북러 정상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와 무관하게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조가 강화될 것"이라면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로운 번영은 요원해질 것"이라고 AFP 통신에 말했다.
◇ "북러 사이의 일"...선 그으면서도 고민 깊어지는 중국
변수는 중국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이 올해 중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12일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EEF)에 중국 측 대표로 참석한 장궈칭 중국 부총리와 '연내로 예정된 최고 수준의 양자접촉'과 관련한 논의를 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앞서 크렘린궁은 지난 7월 푸틴 대통령이 시 주석의 초청에 응해 오는 10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포럼에 참석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중국을 찾는다면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혐의와 관련해 올해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이후 첫 외국 방문이 된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각종 제재에 직면한 중국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 '서방 대 반서방' 전선을 보다 명확히 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일단 이번 북러 정상회담과 관련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2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러 정상회담에 대한 논평 요청에 "북한 지도자의 러시아 방문은 북러 사이의 일(按排)"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북한은 산과 물이 서로 이어진 우호적인 이웃으로 현재 중북 관계는 양호하게 발전하고 있다"며 "우리 양국은 최고지도자들이 달성한 공동 인식을 이행하며 영역별로 교류·협력을 심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진행된 푸틴 대통령과 장궈칭 부총리와의 회동에서도 양국 관계가 크게 발전했다는 언급이 나왔을 뿐 북한 관련 의제가 논의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산하 영자 매체인 닛케이아시안리뷰는 "(북러 밀착은)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중국은 스스로를 북한의 '큰 형'으로 여기며 북한과 러시아가 갑자기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다"면서 "러시아, 북한과 한데 묶이는 것도 미국과의 경쟁을 포함한 중국의 글로벌 전략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동북아 안보 지형의 급변을 초래할 수 있는 러시아의 개입에 신중히 대응할 목적으로 북러 정상회담 결과를 주시하며 여지를 두는 것일 수도 있다. 중국의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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