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이 암호화폐 산업의 제도화를 목표로 한 세 건의 법안을 통과시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암호화폐 수도' 구상에 본격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 중 하나인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규제 법안은 상원을 이미 초당적 지지 속에 통과했으며, 최종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받기 위해 백악관으로 향하게 됐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나머지 두 건-암호화폐 시장 구조를 새로 정비하는 포괄적 법안과 연방준비제도의 디지털 통화 발행을 금지하는 법안-은 상원의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하원에서 308대 122의 표차로 통과된 스테이블코인 법안은, 미국 달러 등 안정적인 자산에 연동된 이 가상화폐에 대한 초기 소비자 보호 및 운용 기준을 설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원은 지난 6월 이미 해당 법안을 초당적으로 가결한 바 있다.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위원장 프렌치 힐(공화·아칸소)은 "전 세계의 결제 시스템이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이 법안은 미국의 경쟁력을 보장하고 소비자 보호 장치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주를 '크립토 위크(Crypto Week)'로 선언한 가운데, 법안 표결은 하원 공화당 내 입장차로 하루 넘게 지연되기도 했다. 결국 공화당 지도부는 세 법안을 개별 표결에 부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포괄적 암호화폐 입법의 향후 상원 통과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내부 분열은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는 보다 광범위한 암호화폐 규제 입법 과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가상화폐 이더리움

(가상화폐 이더리움. 자료화면)

이번 스테이블코인 규제안은 업계와 입법자들 사이에서 암호화폐 산업의 신뢰성과 제도권 편입을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스콧 베슨트 재무장관은 6월, 이 법안이 스테이블코인 시장을 "2030년까지 3조7천억 달러 규모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법안은 발행자에게 자금세탁방지(AML) 및 대북 제재 등 미국 관련 법률 준수 의무를 부과하며,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1:1로 뒷받침할 수 있는 준비금 보유를 요구한다. 상원 은행위원회 소속 공화당 의원들은 "이 같은 규제가 없다면 소비자들은 불안정한 준비금이나 불투명한 운영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원 표결 직후 공화당은 두 번째 법안인 암호화폐 시장 구조 개편안에 대해 상원이 신속히 심의할 것을 촉구했다. 해당 법안은 294대 134로 통과되며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이 법안은 어떤 디지털 자산이 상품으로서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규제를 받을지, 또는 증권으로서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관할을 받을지를 구체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비트코인과 같은 '성숙한 블록체인' 기반 토큰은 상품으로 분류된다.

세 번째 법안은 보다 좁은 표차(219대 210)로 통과됐으며, 연방정부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CBDC는 정부가 발행하는 일종의 디지털 현금이다.

업계는 그간 미국 내 법령의 모호함으로 인해 정상적 운영이 어려웠으며, 바이든 행정부가 명확한 입법 없이 집행 위주로 규제했다고 비판해왔다. 이번 법안 통과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로비와 정치후원으로 워싱턴 내 영향력을 확대해온 암호화폐 업계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

온도 파이낸스(Ondo Finance) 부회장이자 전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인 패트릭 맥헨리는 "이 법안은 1930년대 증권법 제정이 월스트리트를 세계 금융 중심지로 만든 것처럼, 미국을 디지털 자산의 중심지로 만들 세대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가족이 암호화폐 관련 사업에서 금전적 이익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이 대통령 본인에게는 이해충돌 방지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금융서비스위원회 민주당 간사 맥신 워터스 의원(캘리포니아)은 "이번 법안은 트럼프 가족의 부패를 합법화하고 백악관을 최고 입찰자에게 파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법안에는 국회의원과 그 가족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금전적 이익을 얻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지만, 대통령과 대통령 가족은 예외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버지니아 골프클럽에서 트럼프 이름을 딴 밈코인 투자자들과 비공개 만찬을 열었으며, 그의 가족은 USD1이라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 프로젝트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World Liberty Financial)'의 주요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공개된 재정공시 자료에 따르면, 트럼프는 2024년 해당 프로젝트의 토큰 판매로 5,735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트럼프와 연관된 밈코인은 약 3억2천만 달러의 수수료 수익을 창출했으며, 이 수익은 여러 투자자 간에 배분된다.

민주당 상원 의원들은 법안이 규제 기준이 지나치게 낮아 장기적인 금융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며, 대기업들이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 은행위원회 민주당 간사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엘론 머스크와 마크 저커버그가 자신들만의 '돈'을 발행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대형 기술기업들과 대기업 집단의 사적 화폐 발행을 허용하는 법안"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