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고발로 '편집 조작' 드러나... 팀 데이비 사장 사퇴 압박 거세져

공정 방송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영국 공영방송 BBC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왜곡 편집해 방영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에 나설 예정이라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8일 보도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이번 사과는 내부 고발 문건을 통해 조작 의혹이 폭로된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뒤늦게 나온 조치로, 팀 데이비(Tim Davie) 사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트럼프가 하지 않은 말 덧붙였다"... BBC, 6개월간 침묵

영국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BBC 이사회 의장 사미르 샤(Samir Shah)는 오는 월요일 의회 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 폭동 당시 트럼프 연설을 잘못 편집해 시청자를 오도한 점에 대해 사과할 예정이다.

BBC가 문제를 인지한 것은 지난 5월이지만, 샤 의장과 데이비 사장이 무려 6개월 동안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는 내부 증언이 나오면서 은폐 의혹이 제기됐다.

"심각한 조작"... 내부 자문 보고서도 무시

이번 논란의 발단은 BBC 내부 전 윤리자문관 마이클 프레스콧(Michael Prescott)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그는 "트럼프가 시위대를 선동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시점의 연설 장면을 이어붙였다"며 "그 결과 트럼프가 하지 않은 말을 한 것처럼 보여 시청자를 심각하게 오도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 방송
(영국 BBC방송사. 자료화면)

하지만 BBC 경영진은 이를 "기준 위반이 아니다"라며 묵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스콧은 샤 의장에게 "매우 위험한 선례를 남긴다"고 경고했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악관 "좌파 선전기구"... 정치권도 일제히 비판

내부 고발 문건이 공개된 뒤 정치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를 비롯한 다수의 보수당 인사들이 데이비 사장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백악관 역시 "BBC가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를 유포했다"며 "좌파적 선전기구로 전락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문건에는 BBC 아랍어 방송이 가자전쟁 보도에서 반이스라엘 성향의 편향적 보도를 이어왔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BBC의 신뢰 위협받아"... 전문가·전직 간부들도 성토

영국 헌정학 권위자인 버논 보그다노 경(Sir Vernon Bogdanor, 옥스퍼드대 명예교수)은 "BBC가 내가 보낸 왜곡 보도 보고서를 무시했다"며 "이번 사건은 공영방송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전 BBC 텔레비전 국장 대니 코헨(Danny Cohen)은 "지도부가 위기 상황에서 일주일째 잠적했다"며 "데이비와 샤가 이미 6개월 전 문제를 알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전 문화장관 존 휘팅데일 경(Sir John Whittingdale)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트럼프 연설을 사실과 다르게 보여준 것은 명백한 조작"이라며 "이 사건이 BBC의 전체 신뢰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장이 편집 책임자(editor-in-chief) 직함을 겸하고 있는 만큼, 최종 책임은 데이비에게 있다"며 "이전 사장들도 유사한 사안으로 사퇴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BBC 내부 "우리가 뉴스의 대상이 됐다"... 자성 분위기 확산

BBC 뉴스·시사 부문 CEO 데버라 터니스(Deborah Turness)는 금요일 내부 이메일을 통해 직원들에게 "BBC가 스스로 뉴스의 대상이 된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이번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BBC 대변인도 "샤 의장이 월요일 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회에 공식 답변을 제출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BBC 「투데이(Today)」 진행자 닉 로빈슨(Nick Robinson)은 SNS X(옛 트위터)에 "우리는 깊은 사회적 분열 속에 있다. BBC는 이런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듣고 배우며 더 나아져야 한다. 하지만 선전과 허위정보에는 굴하지 않겠다"고 적었다.

신뢰 회복 위한 첫걸음 될까

BBC의 이번 사과는 조작 보도 논란이 불거진 지 반년 만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 사장과 샤 의장이 문제를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이 남아 있어, 단순한 사과로 사태가 수습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과 학계, 내부 직원들까지 "BBC의 신뢰가 무너졌다"고 한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공영방송의 투명성과 독립성 회복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