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비자들이 급격한 물가 상승과 고금리의 이중고 속에서 신용카드 부채 부담에 짓눌리고 있다. 신용카드 연체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으며, 중산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계층이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카드 빚에 의존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9일 보도했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90일 이상 연체된 신용카드 잔액 비율은 13.12%를 기록했다. 이는 최근 15년간 가장 높은 수준이며,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이후 최고치다.

미국인 카드빚 사상 최고
(신용카드 연체율 금융위기이후 최고수준. 자료화면)

미국 전체 신용카드 잔액은 1조2500억 달러로 증가해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1999년 이후 1분기 기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소득자도 예외 아니다

뉴잉글랜드 지역 병원에서 운영 책임자로 근무하는 42세 캐서린 클라크(Catherine Clarke)는 연봉 19만4000달러를 받고 있음에도 신용카드 빚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의 체이스 사파이어 카드 잔액은 어느새 1만5000달러까지 늘어났다. 매달 최소 납부금 572달러는 감당할 수 있었지만 26%에 달하는 고금리 때문에 원금은 거의 줄지 않았다. 외식을 줄이고 체육관 접수원 아르바이트까지 고민했지만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클라크는 "체중 증가와 매우 비슷한 경험이었다"며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 순간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금리 급등이 부채 악순환 촉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에 따르면 신용카드 평균 금리는 2022년 2월 14.6%에서 올해 2월 21%로 급등했다. 일부 카드 이용자는 29%에 달하는 금리를 부담하고 있다.

도시연구소(Urban Institute)의 브레노 브라가(Breno Braga) 경제학자는 "식료품, 주거비, 의료비가 모두 오르면서 신용카드를 갚을 여력이 줄어들고 있다"며 "사람들은 집과 자동차, 공과금을 우선 지키려 하기 때문에 결국 신용카드 상환을 가장 먼저 미루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60일 이상 신용카드 연체자는 전체 카드 이용자의 5.6%로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과 고소득층 지역에서도 연체율이 동시에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존을 위한 부채"로 변질되는 카드 사용

전국신용상담재단(NFCC)은 올해 들어 상담 신청자가 급증했다고 밝혔다. 올해 1월 상담 고객 수는 전년 대비 24% 증가했고, 월평균 상담 규모는 2018년보다 60% 많아졌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미국 중산층 가계가 "생존을 위한 부채(Survival Debt)" 패턴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소비 확대를 위해 카드를 사용했다면 이제는 생활비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빚을 내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인들의 평균 신용카드 부채는 약 6500~6700달러 수준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1만 달러 이상 카드 빚을 보유한 사람들의 비중은 모든 소득계층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저소득층 지역 카드 이용자의 17%, 중간소득 지역의 20%, 고소득 지역의 25%가 1만 달러 이상의 카드 부채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질병·생활비 상승이 빚 폭증으로 연결

메인주에 거주하는 의료보조사 멜리사 메기슨(Melissa Meggison)은 연봉 6만5000달러를 받으며 오랫동안 카드 잔액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2023년 이혼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반려견 사료와 병원비, 취미생활 비용까지 카드로 결제하기 시작했고 일부 카드 금리는 29%까지 치솟았다. 불과 9개월 만에 카드 부채는 2만 달러를 넘어섰다. 연체 수수료가 붙으면서 한 카드의 월 최소 납부금은 1600달러까지 폭등했다.

수시로 걸려오는 추심 전화와 경제적 압박은 정신건강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메기슨은 2024년 자살을 시도해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후 주택을 매각해 대부분의 부채를 상환했으며 현재도 신용카드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중산층도 무너진다

미시간주의 조셉 다니엘-호스트(Joseph Daniel-Hoste) 역시 생활비 부족을 메우기 위해 세 장의 신용카드를 돌려막기 방식으로 사용했다.

그는 가스비, 식료품비, 생활용품 구입 등에 카드를 사용했지만 금리가 24~26%까지 오르면서 상황이 통제 불가능해졌다. 카드 부채는 결국 2만 달러까지 증가했고 부채 문제는 결혼생활 파탄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후 신용상담 기관의 도움을 받아 금리를 6% 수준으로 낮추고 수년간 상환한 끝에 부채를 대부분 정리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주택을 구입해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대선 앞둔 정치권도 긴장

경제적 압박이 커지면서 정치권도 민심 악화를 우려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은 최근 미국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란 전쟁 종결 노력의 배경이냐는 질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했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 불안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소비자들이 코로나19 이후 축적했던 저축을 대부분 소진한 상황에서 높은 생활비와 금리를 감당하기 위해 신용카드에 의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고금리 환경이 장기화될 경우 연체율은 더욱 상승할 수 있으며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경제가 겉으로는 견조한 고용시장과 소비지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계 내부에서는 신용카드 부채가 빠르게 누적되며 상당수 가정이 '한두 번의 예상치 못한 위기만으로도 재정 파탄에 직면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