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헌법 5조 권리 100차례 이상 행사...공화당 "책임 회피" 공세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미국의 대표적 방역 전문가로 주목받았던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전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장이 의회 청문회에서 100차례 이상 진술을 거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파우치는 이번 주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 수정헌법 5조에 따른 자기부죄 금지권, 즉 자신에게 불리한 형사상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반복적으로 행사했다. 팬데믹 기간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신뢰했던 의사가 이제는 공화당 의원들의 거센 추궁 앞에서 침묵하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파우치 측은 이 선택이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진술 거부는 그가 숨길 것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변호인단은 다른 선택지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질문에 답할 경우 팬데믹 혼란 속에서 수없이 했던 과거 발언과의 불일치를 공화당이 위증 혐의로 문제 삼을 수 있고, 아예 출석이나 증언을 거부하면 의회 모독 혐의로 트럼프 행정부 법무부에 회부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랜드 폴 "신뢰 상실이 가장 큰 유산"
청문회를 주도한 랜드 폴(Rand Paul·공화·켄터키) 상원의원은 파우치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는 파우치에게 "당신은 수년 동안 책임을 피해왔다"며 "신뢰 상실이 당신의 가장 해로운 유산일 수 있다"고 말했다.
폴 의원은 오랫동안 파우치를 비판해온 인물이다. 그는 파우치가 위험한 연구를 지원했고, 코로나19의 실험실 유출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다른 과학자들과 공모했으며, 연방 투명성 법률을 회피하려 했고, 자신의 방역 조치와 맞지 않는 증거를 무시했다고 주장해왔다.
파우치 측 변호인은 폴 의원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청문회는 파우치의 위상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를 보여준다. 팬데믹 초기 파우치는 미국 방역의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이 들어간 양말과 피겨가 판매됐고,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그를 표지 인물로 다뤘다. 2020년에는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이 주선한 줌 회의에 파우치가 참여했고,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 애슈턴 커처(Ashton Kutcher), 크리스 록(Chris Rock) 등 유명인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현재 파우치는 자신의 명성과 유산을 둘러싼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바이든 사면에도 현재 증언은 보호 안 돼
조 바이든(Joe Biden)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파우치에게 선제적 사면을 부여했다. 당시 바이든 행정부는 공화당이 정치적 반대자로 간주하는 인사들을 겨냥할 가능성을 우려해 파우치 등을 보호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면은 현재의 의회 증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이번 청문회에서 파우치가 답변하는 내용은 별도의 법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파우치의 지인이자 암 연구 활동가인 엘런 시걸(Ellen Sigal)은 파우치가 청문회가 정당한 사실 규명 절차라고 느꼈다면 질문에 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청문회는 사실을 찾으려는 자리가 아니었다"며 파우치에게 선택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개된 팬데믹 일지, 공화당 공세에 불붙여
청문회에 앞서 폴 의원은 파우치가 팬데믹 기간 작성한 1,000쪽 이상의 일지를 공개했다.
이 일지에는 파우치가 자신의 언론 출연을 세세히 추적하고, 자신의 명성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고 표현한 내용 등이 담겼다. 이는 파우치 지지자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자료가 됐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코로나19 대응을 조율하며 파우치와 함께 일했던 데버러 버크스(Deborah Birx) 박사는 "그가 HHS 서버에 개인적 생각을 적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그 자신에게도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학계가 여전히 파우치를 존중하고 있지만, 이번 청문회는 팬데믹 당시 제한 조치의 결과에 대해 미국인들이 계속 느끼고 있는 좌절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파우치는 공개된 일지에서 2020년 8월 폴 의원과 충돌한 일을 언급하며, 폴 의원이 "숙련된 역학자"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2021년 6월에는 폴 의원과 "미친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일지에 자주 등장했다. 그는 "우파 변두리 소셜미디어가 반파우치 내용으로 불타고 있다"고 적었다.
여론은 여전히 신뢰하지만 하락세
파우치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과거보다 크게 낮아졌다.
애넌버그 공공정책센터가 올해 초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4%는 파우치가 신뢰할 만한 공중보건 정보를 제공한다고 답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보건복지부 장관을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38%였다.
하지만 파우치에 대한 신뢰도는 2021년 4월 애넌버그 조사 당시 71%에서 크게 떨어졌다. 특히 공화당 지지층에서 지지 하락이 두드러졌다.
파우치는 팬데믹 기간과 그 이후 반복적인 살해 협박을 받았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파우치가 은퇴한 뒤에도 연방 경호를 승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를 철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파우치는 현재도 생명 위협 때문에 고가의 민간 경호를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도 파우치 비판 대열 합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과 파우치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마지막 날, 코로나19 백신 개발 속도를 높인 '워프 스피드 작전' 관계자들과 함께 파우치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임기에는 파우치의 강력한 비판자인 케네디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청문회가 열린 날 소셜미디어에서 파우치의 생각은 "미쳤다"고 비난했다.
현재 파우치는 조지타운대에서 강의하고 각종 콘퍼런스에서 연설하고 있다. 지인들은 그가 조지타운에서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지만, 계속되는 공격에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또 공화당 의원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파우치가 이번 청문회에서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해야 했던 점이 그에게 큰 부담이 됐다고 말했다.
파우치는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폴 의원이 자신을 불러낸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감옥에 가야 한다"는 폴 의원의 반복된 공개 발언을 정당화할 말을 끌어내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회 모독·주 차원 수사 가능성 거론
폴 의원은 파우치의 침묵에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상원 국토안보·정부업무위원회가 파우치를 의회 모독으로 판단할지 표결하는 일정을 잡았다. 의회 모독 결정이 내려질 경우, 파우치는 법무부에 형사처벌 검토 대상으로 회부될 수 있다.
토미 터버빌(Tommy Tuberville·공화·앨라배마) 상원의원은 주 차원의 기소 가능성을 거론했고, 플로리다주 법무장관도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론 존슨(Ron Johnson·공화·위스콘신) 상원의원은 파우치에게 추가 소환장을 발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파우치의 구체적 기록을 적극 방어하기보다는 공화당과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는 데 더 초점을 맞췄다. 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 가운데 루벤 가예고(Ruben Gallego·민주·애리조나)와 엘리사 슬롯킨(Elissa Slotkin·민주·미시간)은 청문회에서 발언하지 않았다.
"진정한 코로나 청산의 시작"
파우치 비판론자들은 이번 청문회를 그의 유산이 바뀌는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팬데믹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더 큰 평가가 이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케네디가 과거 이끌었던 백신 안전성 회의론 단체 칠드런스헬스디펜스(Children's Health Defense)의 메리 홀랜드(Mary Holland) 대표는 청문회장에서 파우치 뒤에 앉았다. 그는 이후 케네디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한 생중계에서 "이것은 진정한 코로나 청산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파우치의 후임으로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장을 맡았다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해임된 잔 마라초(Jeanne Marrazzo) 박사는 파우치의 위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이었다. 그렇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마라초는 파우치가 지나치게 영웅화됐고, 결국 그것이 일부 사람들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파우치 유산 둘러싼 정치·과학 전쟁
파우치 청문회는 단순히 한 전직 보건당국자의 증언 거부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국 사회가 팬데믹 당시의 방역 조치, 과학 전문가의 권한, 정부의 투명성, 백신과 제한 조치에 대한 평가를 다시 놓고 벌이는 정치·사회적 충돌이다.
파우치는 팬데믹 당시 미국 공중보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팬데믹 제한 조치와 정부 방역 실패, 과학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번 청문회에서 파우치는 직접 반박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법적으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이 제기하는 "책임 회피"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파우치의 유산은 이제 두 갈래 평가 사이에 놓였다. 한쪽은 그를 전례 없는 보건 위기 속에서 과학적 조언을 제공한 공중보건 전문가로 본다. 다른 한쪽은 그를 팬데믹 정책 실패와 정부 불신의 상징으로 본다.
이번 청문회는 그 논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파우치의 침묵은 미국의 코로나19 대응을 둘러싼 정치적 재판이 이제 본격화되고 있음을 알리는 장면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