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불법 약물 사용자의 총기 소유를 금지한 연방법을 문제 삼은 소송에서 총기 소유권을 주장한 피고인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18일 미국·파키스탄 이중국적자인 알리 헤마니(Ali Hemani)에게 적용된 불법 총기 소지 혐의를 기각한 하급심 판결을 재판관 9대0의 만장일치로 유지했다.
이번 판결은 마약 사용자가 총기를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하는 것이 미 수정헌법 제2조가 보장한 총기 소유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다만 대법원이 마약 사용자의 총기 소유를 금지한 연방법 전체를 무효화한 것은 아니다. 약물 사용과 총기 소지가 어느 정도로 직접 연결돼야 처벌할 수 있는지가 향후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1968년 총기규제법 적용 문제
쟁점이 된 법은 1968년 제정된 총기규제법(Gun Control Act)이다.
이 법은 불법 약물의 사용자이거나 규제약물에 중독된 사람이 총기를 소지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헤마니는 정기적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한다고 수사당국에 진술했으며, 2023년 연방수사국(FBI)이 텍사스주 덴턴카운티에 있는 그의 가족 주택을 수색하면서 글록 9㎜ 권총과 마리화나, 코카인을 발견했다.
그는 이틀에 한 번꼴로 마리화나를 사용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수사당국은 압수수색 당시 헤마니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총기를 소지했다거나, 약물의 영향 아래 총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검찰은 총기규제법상 불법 약물 사용자라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약물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면 적용 어려워"
헤마니는 불법 약물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총기 소지 금지 조항이 수정헌법 제2조에 위배된다며 혐의 기각을 요청했다.
뉴올리언스에 있는 제5연방순회항소법원은 2025년 총기를 소지한 당시 실제로 약물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았다면 해당 금지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법원은 헤마니에 대한 불법 총기 소지 혐의를 기각했다.
트럼프 행정부 법무부는 이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하급심의 기각 결정을 유지했다.
2022년 대법원 판결이 판단 기준
헤마니 측은 대법원이 2022년 제시한 총기규제 판단 기준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은 당시 총기 관련 법률이 수정헌법 제2조에 부합하려면 "미국의 역사적 총기규제 전통과 일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총기규제를 유지하려면 미국 역사에서 유사한 규제가 존재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법무부는 1800년대 일부 지역에서 상습적으로 술에 취하는 사람들의 무장을 일시적으로 해제했던 법률을 근거로 제시했다.
정부는 불법 약물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당시의 '상습적 음주자'와 마찬가지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총기 소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지원을 받은 헤마니 측 변호인들은 정기적인 마리화나 사용자를 상습적으로 술에 취해 있던 사람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무부 "상습 사용자 처벌할 수 있어야"
트럼프 행정부 법무부는 대법원에 불법 약물의 '상습적 사용자'가 총기를 소지하면 기소할 수 있는 기준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법무부는 약물 사용자가 총기를 소지하는 것이 공공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위험한 사람을 일시적으로 무장 해제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은 헤마니에게 적용된 혐의 기각을 유지했다.
대법원이 구체적인 판결 논리를 어느 범위까지 제시했는지에 따라 향후 유사 사건에서 '상습 사용자'의 정의와 약물 사용 시점, 총기 소지와의 연관성 등을 놓고 추가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헌터 바이든도 같은 법으로 유죄 판결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조항은 조 바이든(Joe Biden) 전 대통령의 아들 헌터 바이든(Hunter Biden) 사건에도 적용됐다.
헌터 바이든은 2018년 콜트 코브라 권총을 구입하면서 마약 사용 사실을 허위로 기재한 혐의 등으로 2024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그가 마약을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총기 구입 서류에 불법 약물 사용자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헌터 바이든은 같은 해 임기를 마치기 전 아버지인 바이든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헌터 바이든 사건의 유죄 판결을 직접 뒤집는 것은 아니다. 헌터 바이든 사건에는 총기 소지뿐 아니라 구입 과정에서의 허위 진술 혐의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헤마니의 이란 방문도 FBI 관심 대상
법무부는 법원 문서에서 헤마니의 행동이 FBI의 관심을 끌게 된 배경으로 그의 이란 방문과 형제가 이란 대학에 다닌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헤마니에 대한 기소장에는 국가안보나 테러 관련 혐의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총기규제법상 불법 약물 사용자의 총기 소지 혐의 한 건뿐이었다.
이에 따라 법원은 헤마니가 왜 FBI 수사 대상이 됐는지가 아니라, 약물 사용자의 총기 소지를 금지한 연방법이 그에게 합헌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판단했다.
마리화나 규제 완화도 사건에 영향
마리화나는 오랫동안 연방 규제약물법상 가장 엄격한 등급인 스케줄Ⅰ(Schedule I) 약물로 분류돼왔다.
스케줄Ⅰ에는 헤로인과 엑스터시, 페요테 등이 포함돼 있으며, 남용 가능성이 높고 의학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약물로 취급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마리화나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법무부는 지난 4월 일부 마리화나 제품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마리화나의 위험 등급을 낮췄다.
법무부는 헤마니가 총기를 소지했던 당시에는 마리화나가 스케줄Ⅰ 약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마리화나 제품이나 주 정부의 의료용 마리화나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는 총기 금지조항의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리화나 합법화와 연방법 충돌
미국 여러 주에서는 의료용 또는 기호용 마리화나가 합법화돼 있다.
그러나 연방법상 마리화나 사용은 오랫동안 불법으로 취급돼왔다. 이 때문에 주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사람도 연방 총기법에 따르면 총기 소유가 금지될 수 있었다.
이번 판결은 주 정부의 허가를 받아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과거 약물을 사용했던 사람에게 연방 총기 금지조항을 어디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총기 소지 당시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았고, 폭력적 행동이나 총기 오용의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일률적으로 총기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법적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대법원, 총기 권리 폭넓게 인정
미국 대법원은 최근 수십 년간 수정헌법 제2조가 보장한 총기 소유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왔다.
2008년에는 개인이 자기방어 목적으로 집 안에 총기를 보유할 권리를 처음으로 명확히 인정했다.
2010년에는 이 권리가 연방정부뿐 아니라 주 정부와 지방정부에도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2022년에는 총기규제의 합헌성을 판단할 때 현대적인 공익 비교보다 미국의 역사적 총기규제 전통을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이번 판결도 정부가 특정 집단의 총기 소유를 제한하려면 단순히 위험 가능성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규제 전통과 구체적인 위험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흐름을 이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와이 총기 휴대 제한 사건도 심리
대법원은 또 다른 주요 수정헌법 제2조 사건에 대한 판결도 준비하고 있다.
해당 사건은 상점과 식당 등 일반인에게 개방된 사유지에서 소유주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권총을 휴대하지 못하도록 한 하와이주 법률을 다룬다.
지난 1월 구두변론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하와이주의 제한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관련 판결은 6월 말까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6명과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다만 이번 마약 사용자 총기 소유 사건에서는 이념 성향과 관계없이 9명의 대법관이 모두 하급심 결정을 유지했다.
총기규제 범위 놓고 추가 소송 전망
이번 결정으로 불법 약물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총기 소유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연방법 적용 범위가 좁아질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는 앞으로 피고인이 단순히 과거 또는 정기적으로 약물을 사용했다는 점뿐 아니라, 총기 소지 당시 약물의 영향을 받고 있었거나 약물 사용으로 인해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할 수 있다.
다만 대법원이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의 총기 소지나, 중독으로 인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위험을 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 대한 총기 제한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번 판결은 미국 사회가 빈번한 총기 난사와 총기폭력에 대응하는 방안을 놓고 깊이 갈라진 가운데 나왔다.
총기규제 지지자들은 약물 사용자에 대한 규제가 공공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총기 권리 옹호자들은 구체적인 위험 증거 없이 시민의 헌법상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맞서고 있다.
향후 법원들은 약물 사용의 빈도와 시점, 중독 여부, 총기 소지 당시의 상태, 폭력 위험성 등을 기준으로 연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하게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