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증권거래소 공식 출범...블랙록·골드만·시타델 후원 속 NYSE·나스닥 양강 구도 흔들기 시도

미국 텍사스주가 자체 증권거래소를 앞세워 뉴욕 중심의 미국 자본시장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텍사스증권거래소(TXSE)는 10일 오전 9시 30분 일부 소형 종목 거래를 시작하며 공식 운영에 들어갔다. 거래소 명칭은 '텍시(tex-ee)'로 불리며, 본사는 텍사스주 댈러스에 자리 잡았다.

TXSE
(텍사스 증권거래소 출범. TXSE 웹사이트)

TXSE 출범은 미국 증시가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 붐을 맞고 있는 시점에 이뤄졌다. 스페이스X가 최근 860억달러 규모의 기업공개를 단행하며 역대 최대 IPO 기록을 세웠고, 오픈AI와 앤스로픽 같은 인공지능(AI) 기업들도 수개월 내 상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텍사스는 이러한 IPO '골드러시' 속에서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이 사실상 양분해온 미국 상장 시장의 일부를 가져오겠다는 구상이다.

애벗 주지사의 저녁 자리에서 시작된 구상

텍사스증권거래소 구상은 2022년 가을 휴스턴의 한 저녁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레그 애벗(Greg Abbott) 텍사스 주지사는 지인들과 식사를 하던 중 텍사스에 자체 증권거래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꺼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임스 리(James Lee)가 바로 그 거래소를 만들 인물로 지목됐다.

휴스턴 출신인 리는 전자거래 플랫폼을 창업한 뒤 E*트레이드에 매각한 경험이 있는 기업가다. 이후 예술·교육 관련 단체 이사회 활동도 해왔으며, 자금 조달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텍사스증권거래소 최고경영자로서 월가와 텍사스 정치권, 대형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블랙록·골드만·시타델 등 대형 후원자 확보

TXSE는 출범 전부터 월가의 주요 금융회사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였다.

블랙록(BlackRock),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포트리스 인베스트먼트 그룹(Fortress Investment Group), 찰스슈왑(Charles Schwab), 시타델증권(Citadel Securities) 등이 TXSE의 주요 후원자로 참여했다.

거래 개시 전에는 골드만삭스와 시타델증권 트레이더들이 모의 종목을 활용해 실제 거래를 연습했다.

TXSE는 아직 자체 상장 기업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의 주식을 장중에 거래할 수 있다. 미국 전역의 상장 종목과 상장지수펀드가 이달 말까지 TXSE에서 거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거래소 측의 목표다.

거래소가 대형 기업의 상장을 유치하려면 충분한 유동성, 즉 거래량을 입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 TXSE는 먼저 다른 거래소 상장 종목 거래를 통해 시장 참여자와 거래량을 확보한 뒤, 장기적으로 NYSE와 나스닥에 상장된 기업의 이전 상장이나 신규 IPO를 유치하려 하고 있다.

"텍사스와 연결되는 것이 사업적으로 유리하다"

TXSE가 기업들에 내세우는 핵심 메시지는 텍사스와 연결되는 것이 사업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이다.

거래소와 주정부 관계자들은 텍사스에 상장하는 기업에 유리한 주 법안이 추가로 마련될 수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또 기존 NYSE와 나스닥보다 상장 비용을 낮추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제임스 리 최고경영자는 TXSE가 미국 자본시장의 영구적이고 확고한 일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기업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이 증거가 될 것이라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방식의 상장이 TXSE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TXSE는 뉴욕의 기존 거래소들과 직접 경쟁하기 위해 뉴욕증권거래소 출신 인사도 영입했다. 리는 NYSE에서 일했던 리즈 호커(Liz Hocker)를 영입해 IPO 유치 업무를 맡겼다.

텍사스주는 올해 런던에 사무소를 열고 영국 기업들의 텍사스 진출도 독려하고 있다.

기업 본사 유치에서 증권거래소까지

텍사스의 자본시장 도전은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다.

텍사스 정치권은 수년 동안 기업 친화적 이미지를 앞세워 대기업 본사를 유치해왔다. 현재 포춘 500대 기업 본사가 가장 많은 주는 텍사스다.

스페이스X는 텍사스를 본거지로 삼고 있으며, 오픈AI도 텍사스에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 주요 금융회사들도 텍사스 내 인력을 크게 늘렸다.

골드만삭스의 댈러스 직원 수는 과거 900명 미만이었지만 현재 약 4,500명으로 늘었다. 회사는 5,000명 이상이 근무할 수 있는 대형 캠퍼스를 건설 중이다. 댈러스는 뉴욕에 이어 골드만삭스의 미국 내 두 번째로 큰 거점이 됐다.

JP모건은 뉴욕보다 텍사스에서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댈러스는 금융 관련 산업 종사자 수 기준으로 뉴욕시에 이어 미국 2위 대도시권으로 올라섰다.

델라웨어의 기업법 아성에도 도전

텍사스는 증권거래소뿐 아니라 기업 설립지 경쟁에서도 델라웨어에 도전하고 있다.

애벗 주지사는 2023년 텍사스 비즈니스 법원을 설립했다. 이는 기업 분쟁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기업 친화적인 판사들이 사건을 담당하도록 해 대기업들이 텍사스에서 법인을 설립하도록 유도하려는 전략이었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델라웨어가 기업 법인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일부 대기업 경영진은 델라웨어 형평법원의 판결에 불만을 표시해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론 머스크(Elon Musk)다. 델라웨어 법원이 2024년 테슬라의 수백억달러 규모 보상 패키지를 무효화하자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법인 등록지를 텍사스로 옮겼다.

이후 코인베이스(Coinbase)와 델 테크놀로지스(Dell Technologies)도 텍사스로 이동했다. 엑손모빌(Exxon Mobil)도 올해 뉴저지에서 텍사스로 법인 등록지를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반 woke 거래소' 이미지와 거리두기

TXSE 구상은 나스닥이 상장기업에 이사회 다양성 공시 규정을 요구하면서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부 보수 진영은 나스닥의 규정을 비판했고, 2024년 초부터 텍사스에 이른바 '반 woke' 성격의 거래소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월가에서 돌기 시작했다.

나스닥은 이후 해당 다양성 공시 규정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게 됐지만, 텍사스 거래소 구상은 이미 힘을 얻은 상태였다.

리 최고경영자는 TXSE가 정치적 거래소가 아니라 최고경영자 친화적 거래소라고 설명한다. 즉 특정 이념을 표방하기보다 기업 경영진이 선호하는 규제 환경과 비용 구조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NYSE와 나스닥도 '텍사스 브랜드'로 대응

TXSE의 등장은 기존 거래소들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NYSE는 2025년 전자거래소인 NYSE 시카고를 'NYSE 텍사스'로 재브랜딩하고 법인 등록지도 텍사스로 옮겼다. 또한 애벗 주지사의 전직 고위 참모였던 브라이언 대니얼(Bryan Daniel)을 NYSE 텍사스 대표로 영입했다.

나스닥도 뒤따랐다. 올해 나스닥은 자사의 전자거래소 나스닥 BX를 '나스닥 텍사스'로 바꾸고 텍사스로 법인 등록지를 이전했다.

스페이스X는 대형 IPO를 진행하면서 나스닥과 나스닥 텍사스에 이중 상장했다.

이는 텍사스가 실제로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자본시장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NYSE와 나스닥이 텍사스의 도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 지역 거래소의 부활 가능성

미국에는 과거 지역 증권거래소가 많았다.

1790년 필라델피아 증권거래소가 설립됐고, 1792년 뉴욕증권거래소가 출범했다. 이후 뉴올리언스, 스포캔, 시카고 등 여러 지역 거래소가 생겨났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규제 변화, 거래량 증가로 소규모 지역 거래소들은 점차 합병되거나 문을 닫았다.

1960년대에는 거래량 폭증으로 NYSE가 수작업 주문 처리를 따라가지 못해 수요일마다 문을 닫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서류 작업 위기'는 1971년 나스닥이 전자거래소로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남아 있던 지역 거래소 대부분은 NYSE나 나스닥에 인수됐다. 나스닥은 필라델피아 증권거래소를 인수했고, NYSE 모회사는 2000년대 미국증권거래소를 사들였다.

그 결과 미국 상장 시장은 사실상 NYSE와 나스닥의 양강 체제로 굳어졌다.

TXSE는 이러한 구조에 도전하는 새로운 지역 기반 거래소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실제 승부는 상장 유치

TXSE가 장기적으로 성공하려면 단순히 주식 거래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 기업 상장을 유치해야 한다.

현재 TXSE에는 자체 상장 기업이 없다. 대형 기업이 NYSE나 나스닥에서 TXSE로 이전하거나, 새로 IPO를 준비하는 기업이 TXSE를 선택해야 진정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과제다. NYSE와 나스닥은 오랜 역사와 브랜드, 막대한 유동성, 글로벌 투자자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나스닥도 1970년대 출범 이후 NYSE와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까지 20년이 걸렸다.

TXSE는 텍사스의 기업 친화적 정책, 낮은 비용, 주정부의 지원, 월가 대형 금융기관의 후원을 무기로 삼고 있다.

텍사스 의회도 상장 유치를 돕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한 법안은 텍사스에 법인을 둔 기업이면서 주식도 텍사스에서 거래되거나, 본사가 텍사스에 있는 기업에 대해 주주제안 요건을 더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경영진 입장에서 행동주의 주주나 소액주주 제안에 대응하는 부담을 줄여주는 장치로 평가된다.

"진짜 강세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TXSE는 현재 댈러스 업타운의 임시 사무실에서 운영되고 있다. 내년에는 댈러스 뱅크오브아메리카 타워에 마련될 영구 본사로 이전할 계획이다.

거래소 이사회에는 릭 페리(Rick Perry) 전 텍사스 주지사와 전 증권거래위원회(SEC) 관계자도 포함돼 있다.

첫 거래일에 실제로 거래된 종목은 소형주 일부에 그쳤다. 그러나 TXSE는 이를 미국 자본시장에서 텍사스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거래소 웹사이트에는 "진짜 강세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올라와 있다.

텍사스가 기업 본사 유치와 기업법 개혁에 이어 증권거래소까지 성공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스페이스X와 AI 기업들의 상장 기대감이 커지는 지금, 텍사스는 뉴욕 중심의 자본시장 지도를 다시 그리겠다는 야심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