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트유 5월 이후 첫 100달러 상회...휘발유·디젤 가격 급등에 물가 재점화 우려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면서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 공화당의 중간선거 전략에 부담이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23일 국제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브렌트유가 100달러를 상회한 것은 지난 5월 이후 처음이다.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도 이날 6.2% 급등해 배럴당 92.19달러를 기록했다.

유가 급등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중대한 군사적 처벌"을 경고한 가운데 발생했다.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불안이 에너지 시장을 다시 흔들면서, 한동안 진정되는 듯했던 물가 우려가 되살아나고 있다.

채권금리 급등, 주식시장 하락

에너지 가격 상승은 곧바로 금융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유조선
(유조선. 자료화면)

미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서 10년물 국채금리는 트럼프 2기 들어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10년물 미 국채금리는 이날 4.7%를 넘어 2025년 1월 이후 가장 높은 종가 수준을 기록했다.

주식시장도 흔들렸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와 S&P500지수는 각각 약 1% 하락했다. 나스닥종합지수는 대형 기술기업들의 인공지능(AI) 투자 지출 확대 우려까지 겹치며 2% 넘게 떨어졌다.

채권시장의 움직임은 투자자들이 유가 급등이 물가를 다시 자극하고,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더 올리거나 높은 수준에서 더 오래 유지해야 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기지 금리도 7% 근접 우려

국채금리 상승은 주택시장에도 압박을 주고 있다.

평균 30년 고정 모기지 금리는 6.58%로 올라 거의 1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모기지 금리가 조만간 7%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퍼스트아메리칸파이낸셜(First American Financial)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플레밍(Mark Fleming)은 "최근 며칠 동안 10년물 국채금리가 움직인 것을 보면, 앞으로 몇 주 안에 모기지 금리가 7%에 가까워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는 이미 높은 주택 가격과 금리 부담으로 위축된 미국 주택시장에 추가 부담이 될 수 있다.

휘발유 4달러, 디젤 5달러 넘어

미국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부담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전국 평균 무연휘발유 소매가격은 이번 주 갤런당 4달러를 다시 넘어섰다. 6월에는 임시 휴전과 에너지 가격 하락으로 물가 상승세가 다소 완화됐고, 미국인들의 경제 심리도 이달 초 일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유가가 다시 급등하면서 주유소 가격도 방향을 바꿨다.

디젤 가격은 더 빠르게 오르고 있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23일 기준 전국 평균 디젤 소매가격은 갤런당 약 5.21달러로, 1년 전보다 39% 높았다.

디젤은 트럭, 건설장비, 농기계 등에 사용된다. 따라서 디젤 가격 상승은 단순히 운전자 부담에 그치지 않고 운송비, 건설비, 농산물 생산비를 통해 물가 전반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트럼프, 고유가에 불만...중간선거 부담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높은 유가에 불만을 보여왔다.

WSJ는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들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의 보좌진이 높은 유가가 공화당의 중간선거 전망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참모들에게 휘발유 소매업체와 석유회사에 가격 인하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행정부 내부에서는 에너지 업계에 추가 압박을 가하는 방안 등 가격을 낮추기 위한 여러 방법도 논의됐다.

그러나 석유업계는 행정부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셰브런(Chevron), 코노코필립스(ConocoPhillips), 옥시덴털페트롤리엄(Occidental Petroleum) 등 미국 주요 석유회사 최고경영진은 에너지 시장 혼란과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와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입장은 사실상 이렇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닫혀 있다면, 가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백악관 "이란 위협 약화되면 가격 하락"

백악관은 군사작전이 오히려 에너지 가격 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테일러 로저스(Taylor Rogers) 백악관 대변인은 "미군이 테러리스트 이란 정권의 상업 선박 공격 능력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에너지 자유 흐름 방해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만큼, 석유와 휘발유 가격은 충돌 이전 수준으로 급락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의 논리는 단기적으로 군사 긴장이 유가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이란의 해상 위협을 약화시키면 결국 공급 안정과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당장은 공급 차질과 확전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항공사 타격...연료비 부담 커져

유가 급등은 항공업계에도 직격탄이 되고 있다.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과 사우스웨스트항공(Southwest Airlines)은 변동성이 커진 연료 가격을 반영해 올해 실적 전망을 낮췄다.

아메리칸항공은 이달 초만 해도 올해 세전이익이 15억달러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새 전망에서는 조정된 가이던스 중간값 기준으로 손익분기점 수준을 예상했다. 이 발표 이후 아메리칸항공 주가는 8% 넘게 떨어졌다.

항공사들은 그동안 항공권 가격을 올려 추가 제트연료 비용 상당 부분을 승객에게 전가해왔다. 지금까지 승객들은 높은 운임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항공사 임원들은 운임 인상이 연료비 증가분의 절반 정도만 상쇄하고 있다고 밝혔다.

에너지주는 출렁, 산업주는 압박

전쟁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시장 섹터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S&P500 에너지주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유가 움직임에 따라 큰 폭의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 유가가 오르면 에너지 기업 수익 기대가 높아지지만, 지정학적 위험과 수요 둔화 우려도 함께 반영되고 있다.

반면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산업주는 대체로 유가 상승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다만 이날은 방산주가 급등하면서 산업 섹터가 강세를 보였다.

전쟁과 에너지 가격이 금융시장 전체의 방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기대는 안정적이지만 금리 압박 커져

흥미로운 점은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가 급등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 미 국채와 물가연동국채(TIPS)의 수익률 차이인 손익분기 인플레이션율은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향후 10년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을 약 2.3%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 국채와 TIPS 수익률이 모두 함께 크게 올랐다. 10년물 TIPS 수익률은 2023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단순히 장기 물가 기대가 높아졌다고 보기보다, 연준이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 실질금리를 더 높게 유지해야 할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가, 경제와 선거의 핵심 변수로

이번 유가 급등은 미국 경제에 여러 경로로 부담을 준다.

휘발유 가격 상승은 소비자 지갑을 직접 압박한다. 디젤 가격 상승은 운송과 물류, 농업, 건설 비용을 끌어올린다. 제트연료 상승은 항공사 수익성을 떨어뜨리고 항공권 가격 인상 압력으로 이어진다. 국채금리 상승은 모기지 금리와 기업 차입 비용을 높인다.

경제적으로는 물가 재상승과 성장 둔화가 동시에 우려되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생활비 부담이 커질수록 집권당인 공화당에 부담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너지 가격 안정을 중시해왔지만, 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불안이 계속되는 한 유가를 낮추기는 쉽지 않다.

석유업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동 전쟁과 해상 교통로 불안이 지속되면 유가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 100달러 유가, 트럼프 2기의 새 부담

브렌트유 100달러 돌파는 단순한 원자재 가격 변동이 아니다. 이는 미국 물가, 금리, 주식시장, 항공업계, 주택시장, 중간선거 전망을 동시에 흔드는 변수다.

6월에는 에너지 가격 하락으로 물가 부담이 잠시 완화됐지만, 중동 긴장 재확산으로 그 흐름은 빠르게 뒤집혔다. 휘발유와 디젤 가격은 다시 오르고 있고, 모기지 금리는 7%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해상 위협을 약화시키면 에너지 가격이 다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장은 지금 당장 전쟁과 공급 차질 가능성에 반응하고 있다.

유가가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미국 경제는 다시 인플레이션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공화당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생활비 상승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