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9순회 항소법원이 기아와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한 미국 보험사들의 소송을 다시 심리하라고 결정했다고 LA타임스는 15일(화) 보도했다. 법원은 캘리포니아주 산타아나 소재 연방지방법원에 사건을 돌려보내면서, 도난 차량 관련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 이상의 보험금 청구에 대해 두 회사가 배상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다시 판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은 두 한국 자동차 제조사에 잇따라 가해진 법적 타격 중 가장 최근 사례다. 앞서 기아와 현대차는 차량 구매자들이 제기한 1억4500만 달러 규모의 집단소송과, 여러 주 검찰총장들이 제기한 900만 달러 규모의 소송을 이미 합의로 마무리한 바 있다.

현대 기아차
(당시 도난 취약으로 논란이 되었던 현대 기아차 로고. 자료화면)

두 소송 모두 미국 판매용 모델에서 핵심 도난 방지 장치를 제외했다는 의혹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로 인해 손쉽게 시동을 걸 수 있는 차량들이 미국 시장에 대거 풀렸고, 2022년 틱톡(TikTok)에서 화제가 된 이른바 '기아 보이스(Kia Boys)' 챌린지로까지 이어졌다.

 "2042년까지 도난 지속될 것"…UCLA 연구 결과와 맞물려

이번 항소심 결정은 UCLA의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온 직후 이뤄졌다. 해당 연구는 기아·현대차의 취약 모델 도난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연구를 이끈 UCLA 인류학과 교수 제프리 브랜팅엄(Jeffrey Brantingham)은 "2042년까지도 이들 차량의 도난 건수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모델들은 1980년대 중반 도입된 핵심 안전장치인 엔진 이모빌라이저(engine immobilizer)를 갖추지 않았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만 연간 6만 대 이상의 차량이 도난당했는데, 이모빌라이저 기술이 보급되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에어백, 잠김 방지 제동장치(ABS)와 함께 표준 안전장치로 자리 잡았다. 브랜팅엄 교수는 "자동차 제조사들이 도난 건수를 실질적으로 줄인 요인을 딱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모빌라이저 도입"이라고 설명했다.

기아는 2011년, 현대차는 5년 뒤인 2016년부터 미국 시장용 다수 모델에서 이모빌라이저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장치가 워낙 보편화돼 있던 탓에 절도범들은 한동안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랜팅엄 교수는 "모든 차에 이모빌라이저가 달려 있고 단 한 차종만 없다면, 그 차는 대체로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간다"며 "절도범들이 현대·기아 차량이 쉽게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2020년 무렵부터"라고 말했다.

같은 해 미국 전역에서 자동차 절도가 급증했고, 특히 로스앤젤레스에서는 2019년 여름에서 2020년 여름 사이 도난 건수가 약 두 배로 뛰었다. LA 카운티에는 등록 차량이 거의 800만 대에 이르는데, 팬데믹 초기 몇 달 동안 이 중 수만 대가 거리에 방치돼 있었다. 동시에 수천 명의 잠재적 절도범들이 실직하거나 휴교로 집에 머물렀다는 점도 배경으로 꼽힌다.

UCLA 연구진이 인용한 데이터에 따르면, LA 지역의 절도범들은 전국적 추세보다 먼저 현대·기아 차량에 이모빌라이저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해 표적 절도가 급증했다. 브랜팅엄 교수는 이를 "독자적인 발견"이었다고 표현했다. 밀워키 기반 절도범들이 2021년 여름 '기아 보이스' 영상을 처음 올리기 시작했을 무렵 LA에서는 이미 도난이 급증한 상태였고, 이 밈이 1년 뒤 전국 뉴스에 등장할 즈음에는 LA의 도난 건수 증가세가 오히려 진정되기 시작한 상태였다고 한다.

브랜팅엄 교수는 "미국 내 일부 도시는 2022년 여름까지도 이 취약점을 전혀 몰랐다"며 "애틀랜타를 보면 2022년 6월 보도가 나가자마자 현대·기아 차량 도난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내 자동차 도난 건수는 최근 몇 년 새 크게 줄었지만, '기아 보이스' 대상 모델들은 여전히 범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브랜팅엄 교수는 이런 추세가 중산층 동네에서 저소득층 동네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는 해당 차량들이 중고차 시장을 거치며 이동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오늘날 대다수 자동차 절도범이 단순 드라이브나 이동 목적의 '조이라이더(joyrider)'여서, 도난 차량 대부분이 사용 가능한 상태로 회수·반환돼 다시 절도 대상이 된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그 현대 쏘나타 한 대가 도로 위에 있는 동안 대체 몇 번이나 도난당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보험사 200곳, 10억 달러 배상 청구…항소법원 "캘리포니아 겨냥한 행위"

보험업계는 도난 및 도난 미수와 관련해 이미 10억 달러 이상의 보험금과 비용을 지급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두 자동차 제조사로부터 돌려받고자 한다. 약 200개 자동차 보험사가 두 한국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기아와 현대차가 미국행 차량에서는 이모빌라이저를 의도적으로 제외하면서도 다른 나라 판매 차량에는 이를 표준 사양으로 유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련 소송들은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서 병합돼 진행돼왔다.

앞서 제임스 V. 셀나(James V. Selna) 연방지방법원 판사는 산타아나 소재 자신의 법원이 외국 자동차 제조사에 대한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며 해당 소송을 각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주 제9순회 항소법원은 이 판단을 뒤집었다. 항소법원은 두 회사가 이모빌라이저를 미국 구매자를 위한 '업셀(upsell)' 옵션으로 의도적으로 남겨둔 것으로 판단하며, 그 결과 수백만 대의 기본 모델이 드라이버 하나만으로도 손쉽게 시동을 걸 수 있는 상태로 판매됐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현대·기아의 대미(對美) 선적 물량 중 70% 이상이 캘리포니아주 항구를 거쳤다는 점에 주목하며, 작동하는 이모빌라이저 없이 제작된 차량 대다수가 사실상 캘리포니아를 '표적'으로 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를 대표해 의견서를 작성한 에릭 D. 밀러(Eric D. Miller) 판사는 "한국 법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직접 결함 차량을 판매한 것은 아니지만, 수천 건의 선적을 캘리포니아 항구로 또는 그곳을 거쳐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고의적이고 불법행위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를 명백히 캘리포니아를 겨냥해 실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법인들이 미국 시장에 특화된 설계를 채택했다는 점 또한 이들이 결함 차량을 의도적으로 캘리포니아로 향하게 했다는 결론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결정에 따라 사건은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셀나 판사의 법원으로 다시 돌아가 심리가 재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