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옷가게, 언니는 백화점에서 7∼8년 동안 일해 모은 전 재산이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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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의 탈세 혐의가 확정돼 전셋집이 조만간 경매에 넘겨질 처지인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빌라에 사는 이모(33.여)씨는 17일 감정이 북받친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3년 전 백화점 판매원인 언니와 함께 집주인 류모(73·여)씨에게 전세금 2억원을 내고 방 두 개와 거실, 주방 등을 갖춘 투룸을 빌렸다.

두 사람이 가진 돈만으로는 부족해 부모님이 대출까지 내 전세금을 맞춰줬다고 한다.

문제는 지난해 초 검찰이 부동산 양도소득세와 체납 가산세 등 41억원을 고의로 내지 않은 혐의(조세범처벌법 위반 등)로 류씨와 류씨의 전 남편인 사업가 홍모(76)씨를 기소한 것이다.

홍씨는 2005년 협의이혼을 하면서 류씨에게 해당 빌라를 포함한 재산 대부분을 넘겼고 직후 제주도의 100억원대 부동산도 매각했지만 대금을 회사 직원이 들고 달아나 세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세청이 낸 소송에서 법원은 두 사람의 이혼을 무효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이혼 과정에서의 재산분할 행위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서울고등법원 제19민사부는 지난 9월 "재산분할 약정은 홍씨의 재산을 재산분할의 형식을 통해 류씨 명의로 숨긴 것에 불과해 무효"라고 판시했다.

이후 류씨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인지세를 내지 못해 기각됐고, 판결이 지난달 확정됐다. 결국 이 빌라는 다시 홍씨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직격탄을 맞은 것은 류씨에게 전세금 35억원을 맡기고 이 건물에 사는 세입자 16가구 46명이라고 한다.

류씨가 돈이 없다며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건물이 세금 추징을 이유로 경매에 넘겨지게 되면 밀린 세금이 먼저 변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변호사는 "선의의 제삼자란 점을 들어 국세청과 우선변제권을 다툴 여지가 있긴 하지만 세입자들이 불리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세입자들은 경매를 통해 빌라를 사들인 새 주인에게 '대항력'(건물주가 바뀌어도 기존 계약 내용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을 주장할 수 있지만, 법원이 국세청에 우선변제권을 주면 대항력도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이씨는 "나는 그나마도 확정일자를 늦게 받아 우선변제권에서 밀리면 말 그대로 길바닥으로 쫓겨나게 된다"면서 "올해 결혼할 예정이던 언니는 비용 문제 때문에 결혼이 파투났다"고 토로했다.

다른 세입자들도 사정이 나쁘기는 매한가지다.

최근 아파트를 분양받은 30대 부부는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잔금을 치르느라 3억원이 넘는 대출을 낸 뒤 매달 200만원씩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다.

각각 15년, 13년씩 일해 모은 돈 3억원을 몽땅 떼일 처지가 된 40대 회사원은 스트레스성 간염으로 3개월간 입원했고, 부인은 난임치료를 포기했다.

국세청은 세입자들이 류씨 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도록 가급적 공매 시점을 늦출 방침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전세금은 통상 안전자산으로 굴려서 언제든 돌려줘야 하는데 할머니가 혼자 다 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피해자인 세입자들이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정부를 상대로도 재판을 벌여야 할 판인 세입자 상당수는 가구당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대에 이를 소송 비용을 감당할 처지가 못 된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세입자는 "결국 집주인이 체납한 세금을 세입자들이 대신 갚게 되는 셈"이라면서 "국세청은 홍씨와 류씨가 자식들에게 돈을 빼돌렸는지는 조사할 권한이 없다는데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