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밤 10시 KBS1 '다큐1'을 통해 방송된 성탄 특집 '일사각오 주기철'(권혁만PD 연출)이 각종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고 시청률도 대박을 터트리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피부로 느낄만큼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어서, 이례적으로도 느껴진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닌 한 편의 드라마처럼 만들어진 색다른 구성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이지만, 기독교인인 주기철 목사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히 채웠음에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기독교를 선전하고 광고하는 것이라는 거부감을 거의 느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기철 목사의 참된 신앙과 삶이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오늘날 주기철 목사와 같은 기독교인들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다큐에서 주기철 목사는 자신을 죽인 원수의 나라인 일본인 목회자인 스미요시 에이지 목사(63)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8년 전인 2007년 도쿄의 오이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70여년 전인 1943년 오이교회 원단예배(새해예배) 주보를 들고 나왔다.

스미요시 목사는 당시 주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 교회가 천황에 대한 경배와 기미가요제창을 먼저 하고 예배를 드린 것에 비판하는 것은 물론,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조선인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까지 비판하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듣던 성도들은 분노했고, 그는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됐다.

스미요시 목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후쿠시마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 그러다 쓰나미가 덮쳐 원전이 폭파 당하고 모두가 피난을 간 상황에서도 그는 후쿠시마를 떠나 도쿄로 돌아가지 않았다. 방사능에 의한 죽음도 각오한 것이었다. 스미요시 목사는 자신이 후쿠시마의 섬을 떠나지 않은 것은, 일사각오의 주기철 목사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돌발 설교를 하고 교회에서 쫓겨나고 도쿄를 떠난 아버지로 인해, 당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아들 스미요시 겐(31)은 아버지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도쿄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와 동생은 아버지와 헤어진 것은 물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후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신에게 묻고 싶었다. 무엇이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아버지를 후쿠시마로 향하게 한 것일까. 왜 또 원전폭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이렇게 아버지의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은 70여 년 전 일제에 저항했던 한국인 주기철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주기철 목사에 대해 알기 위해 가혹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던 침략의 땅 일본에서 주기철의 삶을 추적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상처를 받았던 주기철 목사의 아들을 영상을 통해 만나게 된다. 주기철 목사의 막내인, 지금은 고인인 주광조 장로는 다큐 속 동영상에서 "장례식 날 저는 바깥 변소에 들어가서 안에 들어가 문고리를 잠그고 혼자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했어요. 하나님이 다 뭐냐고.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이렇게 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 아버지는 바보라고, 세상에 저런 바보가 어디 있느냐고, 오죽 못나서 자식들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저렇게 죽어가느냐고 저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스미요시 겐은 동영상 속의 남성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70년 전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기 위해 고향인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주기철목사기념관를 찾아간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 시무 시절 기도한 곳이었던 무학산의 십자바위에도 올라가 본다. 주기철 목사는 매일 밤 이 높은 산에 올라 기도했다고 한다. 겐은 "일본 점령 하에 있으면서 신앙인으로 이 산에 올라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라고 질문한다.

위대한 신앙인으로 추앙받는 주기철 목사도 우리처럼 그 신앙의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다. 진해 웅천마을 출신의 주기철 목사는 13살이 되던 1910년 성탄절에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는다. 대단한 신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단한 갈급함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탕과 선물을 준다고 해서 마을의 웅천교회를 찾아간 것으로 그려진다. 이 때는 한일강제합병이 일어나 조선이 나라를 잃었던 때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산학교에 입학해 조만식 선생에게서 애국 사상, 신앙, 민족 정신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에 힘쓴다. 또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25년, 이때는 일제에 의해 남산에 조선신궁이 세워졌던 때였다. 이 신궁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점령을 나타내는 정신적 상징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는 신사참배가 강요됐다.

스미요시 겐은 "어째서 서울의 중심에 신사를 만들어서 신사참배를 강요한 건지, 일본의 중심에 침략국의 상징물을 만들어 경배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굉장히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는 이런 시대에 부산의 한 달 동네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다. 1926년 1월 초량교회의 제3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스스로 사례금을 70원에서 60원으로 깎고, 사모님이 결혼하실 때 가지고 온 땅 6천 평 가량을 조금씩 팔아서 구제에 사용했다.

주기철 목사의 기도, '겸손하기 위하여'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낮어지신 것을 깨닫게 하여주옵소서.당신이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늘의 보좌위에서 천군과 천사와 하늘의 모든 영물과 천천만 성도에게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든 만유의 주재로써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띄글 세상에 오섰나이다.

오시되 왕후장상으로 금전옥루에 오시지 않고 지극히 미천한 사람으로 말 구유에 오섰나이다. 사람이 다 싫여 바리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섰고 어린아이의 동무가 되섰고 걸인과 문둥이의 벗이 되섰나이다. 마츰내 벌거벗은몸으로 강도의 틈에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고 음부에까지 나려가섰나이다.

오 당신이 이같이 낮어지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하오리까? 나는 나를 어디까지 낮초아야 당신 앞에서 합당하겠읍니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섰으니 나는문동이의 발을 핥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섰으니 나는 모든 사람의 발앞에 짓밟히는 먼지와 띄끌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어 마산 문창교회로 자리를 옮겨 목회를 하던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자리를 옮긴다. 당시 평양은 일제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엘리트 목사였고, 유명한 설교자로 인정을 받으면서 교회도 부흥하고 있어 안정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민족의 시련 앞에서 신사참배의 거센 풍랑을 막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양으로 간다.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평양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자 일제의 압박이 시작된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과 민족정신의 최후의 보류였던 산정현교회를 지켜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당시 산정현교회에는 오산학교 선생이었던 조만식 선생을 비롯해 김동원, 유계준, 오윤선 등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장로 등 재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는 부임 후 첫 설교에서 신사참배 금지를 선언했다.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밝힌다. 대부분의 교단들이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있던 당시,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회만이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스미요시 겐은 주기철 목사가 갇혀 있었던 평양 형무소와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한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셨는가? 그리고 주기철 목사가 이렇게까지 당하면서 지키려 했던 신념은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한다.

주기철 목사는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가장 중요히게 여기는데,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하나님을 의미함)을 배반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고문관의 하나님에게 참배하듯이 일본 천황에게 참배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에는 "아녀자에게는 정절의 의가 있고, 신하에게는 충절의 의가 있듯이 믿는 자에게는 신념의 의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조, 사랑이 신사참배를 막았던 것이다.

그리고 1939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당시 총회장에는 일본 경찰들이 꼭 차 있었고, 그 위협 앞에서 마지막 보루였던 장로교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장로교회 임원 27명이 평양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다. 이 소식을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듣는다. 일부 지도자들은 1943년 일본에까지 가서 일본 신궁에 참배한다. 그리고 1941년에는 일부 목회자들이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한강에서 일본식 침례의식 '미소기바라이'을 치르기도 한다.

주기철 목사는 월간 '설교' 1938년 3월호 게재한 '하나님을 열애하라'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교회를 보매 그 교인된 동기, 그 신앙의 동기는 불순유치한 것이 많고 성심과 열애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극히 적도다. 주께서 당시에 당신을 따르는 군중을 향하여 '너희를 아노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마음에 없도다'(요 5:42) 하신 탄식은 오늘날 조선의 신자를 향한 탄식이 아닐 수 없다."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주기철 목사는 잠시 석방되는데, 5개월만에 다시 교회로 돌아온 후 첫 설교에서 일본 경찰이 버젓이 예배당 안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다섯 가지의 나의 기도'를 전한다. 산정현교회에서의 마지막 기도이자 설교였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이 죽음이 무서워 내가 의를 버리고 이 죽음을 면하려고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거늘 어찌 내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채 하오리이까?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거늘 어찌 내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채 하오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내가 백년, 천년 산들 그것이 무슨 삶이리요?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나의 기도는 "장시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한두 번 받는 고난은 혹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 말 한마디 타협하거나, 내 고개 한번 까딱하면 이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리요?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가야 70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주님과 더불어 영생불사의 몸이 될 것이라.

셋째, 나의 기도는 "내 어머니와 내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입니다.

나에게는 70이 넘는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아들 넷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한 남편과 아비된 책임도 무거워 더욱 괴롭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알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이 마음 한없이 괴롭습니다. 인정의 젖줄에 내가 얽매이지 않게 기도합니다. 순교자로서 갖춰야 할 초인적인 용기를 주소서.

넷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라고 내 주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오직 의에 죽고 의에 살게 하옵소서.

다섯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입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더러운 땅을 밟던 이 제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길을 걷게 하옵소서. 죄악에 오염된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이는 순교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다큐에서, 주기철 목사의 이 같은 설교에 성도들은 다큐에서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당시 현장에서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1939년 12월 평양노회 임시총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파면을 당한다. 담임목사가 없는 가운데 성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이어나간다. 결국 1940년 3월 24일 평양 산정현교회는 강제로 폐쇄된다.

주기철 목사의 가족은 사택에서 쫓겨나고, 가족들에게도 피해가 이어져 이사를 13번이나 다니는 고초를 당한다. 그리고 먹을 음식도 없었지만, 경찰들의 눈을 피해조만식 선생 가족 등이 주는 겨우 겨우 전해준 쌀과 감자 등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1940년 9월 20일 주기철목사는 마지막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간다. 그리고 거리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이 묶인 채 자신의 마지막 설교를 전한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외면했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는 어쩌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난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그리고 광복을 1년 앞두고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석방시켜주겠다면서 평양경찰서 지하실에 갇혀 있던 주기철 목사를 만나게 해준다. 주기철 목사는 지하실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있었는데, 일본 경찰들은 자신의 참혹한 모습들을 가족들에게 보여준 후 항복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의 사모인 오정모 사모는 오히려 "어머니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승리하셔야, 순교하셔야 한국교회가 삽니다"라고 말하고, 주기철 목사는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아이들과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하늘나라에서 만나자고 답한다.

다큐에서 간수는 그러자 "당신이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당신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주기철 목사는 "나는 내 힘으로 이 고통을 견디고 있는게 아니오. 오로지 그분의 존재와 사랑때문이요. 나도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주님이 내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소"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주기철 목사를 고문하고 의식을 잃고 실려 나간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는 마침내 1944년 4월 21일 광복을 4개월 여 앞두고 48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주님, 주님께서 이르신 곳에 나도 이르게 하소서"

다큐에서 주광조 장로는 "이제 내 나이가 73살인데, 이제 와서 60년 전의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은 옛 추억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서 "자신의 믿음을 세상의 명예와 평안으로 바꾸지 않은 당신, 말로써 예수 사랑을 주장하지 않고 행동으로써 예수 사랑을 보여주었던 당신, 예수 사랑과 나라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당신, 그런 믿음의 선배를 저는 오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경한다"고 말한다.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신앙은 일본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했던 가미카제 특공대 출신 무토 키요시 목사(89)는 명함을 만들었는데, 한국어로 일본의 과거를 용서해달라는 문구를 넣었다.

주기철 신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인 목사인 노데라 히로부미(53)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할 수 있는 법은 당시에 없었다. 다만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한국에서부터 전해 듣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일본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근본부터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다.

또 스미요시 겐의 아버지는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피해 이주민 마을에서 이주민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신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대지진과 원전폭발사고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방사능으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와 주기철 목사가 떠올랐다고 한다.

스미요시 에이지 목사는 "원전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도망을 가지 않으면 방사능에 피폭돼 죽을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됐다"면서 "타협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일사각오라는 신앙으로 타협하지 않았던 주기철 목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저의 목회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말했다.

스미요시 겐은 주기철 목사의 아들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인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의 묘지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방송이 나간 25일 밤 10시부터 12시 사이 '일사각오 주기철'은 각종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1위로 급상승하면서 '2015 싸이 콘서트'를 앞질렀다.

시청률 또한 종교인물을 다룬 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수도권 8.6%, 서울 9.7%을 기록하며, 동일시간대 KBS '다큐1′ 정규프로그램으로서는 올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다큐1' 시청자 게시판과 실시간 검색어 등에는 감동과 감사의 뜻을 전하는 글들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홀로 '일사각오'의 길,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주기철.

그의 생애를 재조명 했던 이번 프로그램은, 가해자의 나라 일본인을 프리젠터로 설정해 그의 시선을 통해 주기철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구성방식을 채택했다. 일본인 프리젠터가 주기철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다큐와 드라마가 교차되면서 일본 침략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연출을 담당했던 권혁만 PD는 이번 방송을 통해 "낮은 곳으로 오셔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랑'을 전했던 '공의로우신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감사하다"며, "방송 버전에서는 시간 제약으로 이미 촬영된 드라마의 주요 장면들이 많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방송분과는 전혀 다른 구성과 형식의 영화로 제작해, 내년 3월 초에 전국 영화관에서 개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