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학살' 발언 학칙위반 여부에 모호한 의회 증언
성난 유대계·정치인들 대학총장들에 퇴출·사죄 압박
"표현의 자유 존중" 하버드대 교수 570명 총장 지지 선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 와중에 학생들의 '반(反)유대주의 발언'에 모호한 태도를 보인 미국 명문 대학 총장들을 둘러싼 논란이 번지고 있다.
반유대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과 대학 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하며 갈등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문화전쟁으로 확대되는 기세다.
10일(일) 미 CNN 방송과 일간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매길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이 전날 사임을 발표한 이후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으면서 이제는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의 거취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 5일 미 하원 교육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시작됐다. 청문회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학내 갈등이 커진 가운데 일부 학생이 '유대인을 학살하자'고 과격한 주장을 펼친 데 대해 '학칙 위반인가'라는 질의가 나온 게 발단이었다.
청문회에 참석한 매길 총장과 게이 총장, 샐리 콘블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은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는 등의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에 미 정치권은 물론이고 교내 구성원, 경제계 거물들로부터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미 하원은 이들 대학에 대한 공식 조사에 착수했고 고액 기부자들은 대학에 대한 기부 철회 의사를 밝혔다.
펜실베이니아대는 결국 9일 매길 총장의 사임을 발표했다.
청문회에서 이들 총장을 압박했던 공화당의 엘리스 스터파닉 의원은 엑스(X·옛 트위터)에 "하나는 갔고, 둘 남았다"고 썼다. 남은 둘은 게이 총장과 콘블루스 총장을 뜻한다.
그는 "하버드와 MIT, 옳은 일을 하라"며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스터파닉 의원은 "게이 총장은 유대인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요구하는 것이 하버드대 윤리 규범 위반인지 질문을 내게서 17차례 받았고 자신의 진실을 17차례 얘기했다"고 말했다.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미국 주요 대학에서는 친(親)팔레스타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명 발표나 시위가 이어지면서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퍼졌다.
대학 측이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반유대주의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으며, 친팔레스타인 학생 채용 취소나 대학에 대한 기부 철회 등 움직임도 일었다.
이번 청문회 발언 사태는 총장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 대학과 사회 시스템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대 방문 연구원인 랍비 데이비드 울프는 CNN에 유대인을 압제자로 보는 학내 이념과 싸우는 일은 "위원회나 대학 한 곳보다 더 크게 다뤄져야 할 문제"라며 "한 사람을 고용하거나 해고한다고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NYT는 공화당 등 보수진영에서 오랫동안 미국 명문대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나 사회 정의를 주장하며 '숨 막히는 이념주의'에 매몰돼 있다는 주장을 펼쳐 왔는데, 이번 사태로 이들의 주장이 기회를 포착했다고 분석했다.
청문회에서 버지니아 폭스(공화·노스캐롤라이나) 하원의원은 "내가 말하는 것은 인종에 기반한 급진좌파 이념에 찬성하는 데 내재한 중대한 위험"이라며 "제도적인 반유대주의와 혐오는 귀 기관의 문화가 가져온 독"이라고 말했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도 비판에 가세했다.
유대인인 버니 샌더스(무소속·버몬트) 상원의원은 이날 CBS 방송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누군가가 유대인 제노사이드(genocide·소수집단 말살)의 가치를 믿는다고 말하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미 의회 의원 70명 이상이 이들 세 총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그러나 발언을 이유로 정치인들이 조사를 벌이고 기부 철회를 경고하며 총장 사퇴를 압박하는 것은 학자가 자유롭게 견해를 밝힐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다.
10일 저녁 기준 하버드 교수진 최소 570명은 대학 측을 향해 "학문적 자유에 대한 하버드의 약속과 어긋나는 정치적 압박에 저항하라"며 게이 총장을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탄원서에는 "다양한 공동체에서 자유로운 탐구 문화를 수호하는 중요한 작업은 외부 세력에 의해 결정되도록 놔두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이들 교수진 외 더 많은 교수가 서명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탄원서는 이날 총장 해임 권한을 가진 이사회인 '하버드 법인'에 전달됐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탄원서를 공동 작성한 앨리슨 프랭크 존슨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는 "우리는 정치적 스턴트 때문에 그(게이 총장)를 잃고 싶지 않다"면서 "게이가 학자이자 동료, 행정가로서 때로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 법학 교수 벤 아이델슨도 소셜미디어(SNS)에 "그(게이)는 잘못한 게 없다"면서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하는 이 생각을 직접 말로 꺼내는 이가 너무 적다는 게 두렵다"고 적었다.
WP는 이번 전쟁을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이미 여러 대학이 '자유로운 발언과 토론 보장' 정책과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 학생·교직원 보호' 정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고 전했다.
고등교육 비영리조직인 미국교육협의회(ACE)의 테드 미첼 회장은 지난주 공립·사립 대학 총장들의 회의에서 다수가 '발언'에 대한 학칙을 둘러싼 질문과 우려를 공유했다면서 각 기관에서 "보호받는 발언의 범위를 더 빡빡하게 규정하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한데 모이지 않으면서 극명한 의견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대 학생인 레이철 밀러(21) 씨는 WP에 매길 총장의 사임 결정은 잘된 일이라면서 "반유대적 행위가 너무 오랫동안 처벌받지 않았다. 학교가 반유대주의에 대해 더 강경한 사람을 (총장으로) 뽑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펜실베이니아대 학생 비네이 코스라(20) 씨는 총장 사임이 강력한 기부자들이 대학의 중요한 결정을 대신 내리는 선례를 남겼다며 "후임자는 누구든 학생들의 활동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훨씬 더 엄격한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하버드대의 매버릭 야수다 씨는 게이 총장이 청문회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변을 어떻게든 내놓지 못했을 것이라며 "뭘 어떻게 하든 논쟁과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면서 이제 반유대주의는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 낙태권, 기후변화, 총기 규제 등과 더불어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서 유대인 가운데 미국에서 가장 높은 선출직 공직자인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말 40분에 걸친 상원 연설에서 "유대인들에게 반유대주의 확산은 위기"라면서 "최고 수준의 화재 경고이며 반드시 진압돼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지난달 자신의 X 계정에서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주장하는 글에 공개적으로 동조했다가 광고주 이탈 등 반발이 일자 따로 해명 글을 올리는 등 수습에 나선 바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