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콘텐츠 규제를 주도했던 전직 고위 관료에 대해 입국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4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의 온라인 콘텐츠 규제가 미국인과 미 기술기업을 검열하고 있다고 비판해온 가운데, 전직 EU 집행위원이 직접 제재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 국무부는 24일 성명을 통해, 온라인 콘텐츠 법 집행과 관련해 "글로벌 검열 산업 복합체(global censorship-industrial complex)의 대리인"으로 규정한 5명에 대해 비자 제한 조치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제재 대상에는 프랑스 국적의 Thierry Breton 전 EU 내부시장 집행위원이 포함됐다.
디지털서비스법(DSA)이 핵심 쟁점
미 국무부에 따르면, 브르통은 2024년까지 EU 내부시장 집행위원으로 재직하며 유럽의 디지털 규제 체계를 설계·집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문제 삼은 법은 2022년 통과된 EU의 디지털서비스법(DSA)으로, 대형 온라인 플랫폼에 대해 불법 콘텐츠 확산, 허위정보를 통한 선거 개입 위험 등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법이 미국 빅테크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결과적으로 미국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번 조치가 "미국 플랫폼에 특정 관점을 검열·수익 차단·억압하도록 강요해온 조직적 노력의 주도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루비오는 공식 발표에서 EU 법 자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시민사회 인사들도 제재 대상
이번 비자 제한은 브르통 외에도 유럽과 영국, 독일의 시민사회 단체 인사 4명에게 적용된다. 이들은 허위정보 및 혐오표현 대응 활동을 해온 단체의 지도부로, 유럽의 디지털 규제를 지지하거나 정책 논의에 참여해온 인물들이다.
대상자에는 영국 기반 '센터 포 카운터링 디지털 헤이트(CCDH)'의 임란 아흐메드 대표, '글로벌 디스인포메이션 인덱스'의 클레어 멜퍼드 대표, 독일 단체 '헤이트에이드(HateAid)'의 안나레나 폰 호덴베르크와 요제피네 발롱이 포함됐다.
미 국무부는 이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미국 입국을 금지하며, 이미 체류 중일 경우 출국 조치가 내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브르통 "매카시즘식 마녀사냥"
브르통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번 조치를 "1950년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 캠페인을 연상시키는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검열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미 국무부는 브르통이 지난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일론 머스크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인터뷰 생중계를 앞두고, DSA 위반 가능성을 경고하는 서한을 보낸 점도 문제 삼고 있다.
EU 강력 반발..."규제 자율성 침해"
EU 집행위원회는 이번 미국의 조치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히며, 공식 해명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집행위 대변인은 "필요하다면 부당한 조치에 맞서 EU의 규제 자율성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방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제재가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약화시키려는 협박이자 강압"이라고 비판했다. 독일 외무장관 요한 바데풀 역시 "민주적으로 채택된 EU 법률에 대해 외부에서 제재를 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미·EU 갈등, 디지털 규제로 확산
이번 조치는 이미 관세·안보·기술 규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된 미·EU 관계에 또 다른 갈등 요인을 더했다. 디지털 공간에 대한 규제 권한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인식 차이가, 이제 외교·제재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