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강제노동 문제 대응을 명분으로 중국과 유럽연합(EU)을 포함한 주요 교역 상대국에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연방대법원 판결로 기존 관세 부과 권한의 핵심 근거가 약화되자, 백악관은 다른 법적 수단을 활용해 이른바 '관세 장벽'을 다시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2일 늦게 발표한 자료에서 EU와 영국, 캐나다, 멕시코 등 다수의 교역 상대국이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상품의 수입을 충분히 차단하지 못했다며, 이들 국가의 상품에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국과 일본, 인도 등 일부 국가는 강제노동 상품 수입을 금지하지 않았고, 트럼프 행정부와 관련 약속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5%의 관세율을 적용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들이 강제노동으로 만들어진 상품의 수입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캐나다·멕시코도 대상 포함...USMCA 준수 상품은 예외
이번 관세 대상에는 캐나다와 멕시코도 포함됐다. 다만 USTR은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준수하는 상품은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설명했다.
캐나다와 멕시코의 대미 수출품 가운데 상당수는 USMCA 기준을 충족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올해 해당 무역협정이 재검토될 예정인 만큼, 이번 조치는 북미 무역 질서 전반에도 추가적인 불확실성을 던질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광범위한 상호관세를 통해 주요 교역국에 압박을 가했지만, 올해 2월 연방대법원 판결로 관세 부과의 핵심 법적 근거 중 하나를 잃었다. 이후 행정부는 다른 법률을 활용해 대부분의 교역 상대국에 10% 관세를 설정했지만, 이 조치도 오는 7월 말 만료될 예정이다.
'관세 장벽' 재건 시도
전문가들은 이번 강제노동 관세가 단순한 인권 문제 대응을 넘어,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정책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전략의 일부라고 보고 있다.
스위스 IMD 비즈니스스쿨의 사이먼 에버넷 지정학·전략 교수는 이번 조치에 대해 "행정부가 조사 하나하나를 통해 관세 장벽을 다시 쌓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관세안은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하고 있다. 무역법 301조는 상대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이 확인될 경우 미국이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같은 법적 근거를 활용해 산업 과잉생산 의혹이 제기된 16개 경제권에 대해서도 별도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제노동 관련 관세는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했던 이른바 상호관세를 대체하는 성격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301조, 트럼프 행정부의 새 핵심 무역수단으로 부상
무역 전문가들은 301조가 행정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한다고 지적한다. 조사가 완료되면 행정부는 관세 부과 대상과 세율을 비교적 폭넓게 조정할 수 있다.
아시아 기반 싱크탱크 힌리치재단의 데보라 엘름스 무역정책 책임자는 "의지가 강한 행정부의 손에 들어가면 301조는 매우 강력하고 유연한 도구가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관세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존의 포괄적 관세 방식이 법적 제약에 부딪히자, 강제노동, 산업 과잉생산 등 개별 사안을 근거로 삼아 새 관세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EU·중국 즉각 반발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즉각 반발했다. EU는 이번 관세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 역시 자국에는 강제노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미국이 관세를 "정치적 조작의 구실"로 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EU는 특히 지난해 미국과 체결한 무역 합의를 거론하며, 미국이 당시 합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U는 지난해 여름 다수의 미국산 상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는 등 여러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미국이 EU 상품 대부분에 대한 관세를 15%로 제한하기로 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진행 중인 미국의 산업 과잉생산 조사 결과에 따라 EU에 대한 301조 관세가 추가될 경우, 관세 총액이 15% 상한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다만 미국 정부가 최종적으로 합산 관세율을 15%로 제한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미국이 지난해 무역 합의 조건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EU 역시 강제노동 문제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공유하고 있으며,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의 판매를 차단하는 법률을 이미 통과시켰다고 설명했다.
강제노동 규제 실효성 둘러싼 논란
강제노동 금지 조항은 명분상 강력하지만, 실제 집행은 매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특정 상품이 강제노동과 관련됐는지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힌리치재단의 엘름스는 강제노동 금지 조치는 집행이 매우 어렵다며, 각국이 충분한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입증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번 관세안이 향후 교역 상대국과의 협상에서 광범위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이 강제노동 대응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관세 부과 여부와 세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개 의견수렴 거쳐 최종 결정
이번 관세안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USTR은 앞으로 몇 주 동안 공개 의견수렴 절차를 거칠 예정이며, 그 과정에서 관세율이나 대상국, 적용 품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법원 판결로 약화된 기존 관세정책을 새로운 법적 근거와 개별 조사 방식으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강제노동 문제는 그 첫 번째 주요 명분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이번 조치가 실제 시행될 경우 미국과 중국, EU를 비롯한 주요 교역국 간 무역 갈등은 다시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강제노동, 산업 보조금, 과잉생산, 공급망 통제 등 가치와 안보를 앞세운 무역 규제가 확대되면서, 세계 교역 질서는 한층 더 분절화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