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영국 총리가 노동당 내부의 거센 퇴진 압박 끝에 당 대표와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스타머 총리는 22일 런던 다우닝가 총리관저 앞에서 노동당 대표직을 사임하되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해 질서 있는 권력 이양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후임 선출 절차는 이르면 7월 중순 마무리될 수 있다.

스타머 총리는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을 이끌며 집권했지만, 5년 임기 가운데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됐다.

그는 "우리 당이 지금 묻고 있는 질문은 내가 다음 총선까지 노동당을 이끌 적임자인지 여부"라며 "의원들이 내놓은 답을 들었고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버넘, 노동당 대표 선거 출마 선언

스타머 총리의 사임으로 앤디 버넘(Andy Burnham) 전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이 차기 노동당 대표와 총리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스타머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사임. 자료화면)

버넘은 최근 잉글랜드 북서부 메이커필드(Makerfield) 보궐선거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의회에 복귀하면 스타머 총리에게 지도부 도전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버넘은 스타머의 사임 발표 후 노동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며 "당과 국가를 위한 긍정적인 쇄신 과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노동당 규정상 원내의원 20% 이상의 지지를 받은 의원은 당 대표에 도전할 수 있다.

다른 후보가 출마할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버넘이 경쟁 없이 대표직을 맡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웨스 스트리팅, 버넘에게 도전하지 않기로

버넘의 주요 경쟁자로 거론됐던 웨스 스트리팅(Wes Streeting) 전 보건장관은 버넘을 상대로 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다른 후보가 나오지 않을 경우 버넘은 7월 중순께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뒤 총리직을 승계할 수 있다.

버넘이 총리가 되면 영국은 7년 동안 여섯 번째 총리를 맞게 된다.

최근 영국 총리직은 테리사 메이(Theresa May),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리즈 트러스(Liz Truss), 리시 수낵(Rishi Sunak), 스타머에 이어 다시 새로운 인물로 교체된다.

이는 세계 5위권 경제대국인 영국에서 이례적인 정치적 불안정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당 의원들, 총선 참패 우려해 사퇴 압박

스타머 총리에 대한 퇴진 압력은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대규모 패배를 기록한 뒤 급격히 커졌다.

노동당은 여러 지방의회에서 권력을 잃으며 전후 최악 수준의 지방선거 성적을 거뒀다.

상당수 노동당 의원들은 스타머 체제로 2029년 총선을 치를 경우 당이 참패하고 자신들도 의석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반이민 정책을 앞세운 개혁영국당(Reform UK)이 전국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을 앞서면서 지도부 교체 요구가 확산됐다.

노동당 의원들은 장기간의 공개적인 당권 투쟁을 피하기 위해 스타머가 자진 사퇴하고 버넘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압박했다.

스타머는 앞서 어떤 지도부 도전에도 맞서겠다고 밝혔지만, 주말 동안 의원들의 퇴진 요구가 급증하자 입장을 바꿨다.

노동당 집권 1기 중 지도자 축출은 처음

노동당이 집권 첫 임기 중 자당 총리를 사실상 퇴진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총선에서 승리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총리가 당내 반란으로 물러난 것은 영국 노동당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스타머는 2024년 총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 번째로 큰 의회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의석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하락과 정책 혼선, 당내 불만을 극복하지 못했다.

노동당 의원들은 유권자 조사에서 스타머보다 버넘의 경쟁력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점을 지도부 교체의 근거로 제시했다.

버넘, 메이커필드 보궐선거 압승

버넘은 메이커필드 보궐선거에서 개혁영국당 후보를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버넘 지지자들은 이 결과가 그가 나이절 패라지(Nigel Farage) 개혁영국당 대표를 상대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다만 메이커필드 선거구의 유권자는 약 7만7,000명으로, 한 지역의 선거 결과만으로 전국적인 경쟁력이 입증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버넘이 총리에 오른 뒤 지지율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노동당이 2029년 이전에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두 차례 당 대표 도전 실패 후 총리 눈앞

56세인 버넘은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노동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패했다.

그는 최근까지 영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광역권인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을 맡았다.

시장으로서 약 30억 파운드, 미화 약 39억7,000만 달러 규모의 예산을 관리했다.

총리가 될 경우 버넘은 몇 주 만에 지방정부 수장에서 약 1조4,000억 파운드 규모의 국가재정을 책임지는 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투자자들, 버넘의 재정정책 주시

금융시장과 투자자들은 버넘이 정부 차입이나 증세를 확대할지 주시하고 있다.

영국의 조세 부담은 국내총생산 대비 비율로 전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정부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재원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방비도 늘려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버넘은 과거 '친기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공공서비스와 주요 기반시설에 대한 정부 통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에 집중된 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하고, 낙후된 영국 지역의 제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입장도 밝혀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현재 정부의 재정준칙을 준수하고 이민을 줄이려는 노동당 정부의 정책도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며 중도 쪽으로 이동했다.

저성장·고령화·차입비용 상승이 과제

버넘이 총리가 되면 낮은 생산성과 차입비용 상승, 인구 고령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영국 정부의 지출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조세 부담도 수십 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버넘은 영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가 됐다고 주장하는 패라지와 개혁영국당의 공세에도 대응해야 한다.

차기 총선은 2029년으로 예정돼 있지만, 노동당의 지지율과 버넘 정부의 성과에 따라 정치 일정이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이민 문제, 차기 정부 최대 쟁점

이민은 영국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유럽연합 출신 이민자 대신 비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의 입국 규제를 완화하면서 합법·불법 이민이 모두 기록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다.

노동당 정부는 이민 규정을 강화했지만, 패라지는 노동당이 입국자 수를 충분히 줄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개혁영국당은 보수당의 중산층 지지층과 노동당의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 지지층을 동시에 흡수하고 있다.

좌파 성향 녹색당도 도시 지역의 진보 유권자들을 노동당에서 끌어가고 있다.

트럼프 "이민·에너지 문제 해결 실패"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미국 대통령은 스타머 총리가 사임하기 전인 21일, 그가 이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스타머 정부가 영국의 높은 에너지 가격을 낮추기 위해 석유와 가스 시추를 확대하지 않은 점도 비판했다.

스타머는 재임 기간 트럼프 대통령과 예상 밖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양국 정상의 개인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미국의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지 못했다.

브렉시트 이후 이어진 정치적 혼란

영국 정치의 불안정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본격화됐다.

세계화와 이민, 지역 간 경제격차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면서 노동당과 보수당이 주도해온 기존 양당체제가 흔들렸다.

브렉시트와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간의 저성장과 이민 급증이 겹치면서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유럽 각국에서도 기존 정당과 지도자의 지지율이 수십 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우파와 좌파 포퓰리즘 정당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

중도적 접근, 유권자에게 충분한 지지 못 얻어

스타머는 정부가 유권자의 일상생활에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기존 국가체계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대대적인 제도 개편보다 중도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진적 접근은 강한 메시지와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에게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개혁영국당은 대규모 이민 단속을 약속했고, 녹색당은 부유층 증세를 통한 대폭적인 정부지출 확대를 주장했다.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가운데 약 절반이 이후 노동당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류 후원·난방비 지원 중단 논란

스타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여러 정치적 논란을 겪었다.

한 기부자가 스타머와 그의 부인에게 의류를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도덕성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노인들에게 지급하던 겨울철 난방비 지원을 갑작스럽게 축소해 비판을 받았다.

스타머 정부는 총선 당시 주요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집권 후 전후 최대 수준에 속하는 증세를 시행했다.

최저임금도 인상했지만 기업들은 인건비 상승으로 사업활동이 위축됐다고 주장했다.

노동당 내부 "논쟁과 추진력 부족"

여성과 아동 폭력 방지 업무를 담당했던 제스 필립스(Jess Phillips) 전 장관은 올해 사임하면서 스타머의 지도방식을 비판했다.

필립스는 논쟁을 피하려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정책을 설득하고 추진하는 과정도 약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품위와 신중함도 중요하지만 정치 지도자에게는 싸우고 설득하며 정책을 밀어붙이는 능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타머 정부가 분명한 정치적 주장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개혁영국당과 녹색당이 더 강한 메시지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지적이다.

물가·이민·병원 대기시간에서는 성과

스타머 정부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것만은 아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낮추고 합법 이민자 수를 줄였으며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진료 대기시간도 단축했다.

유럽연합과의 관계도 개선했고 경제의 급격한 불안정도 진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만으로 지방선거 패배와 낮은 지지율, 노동당 의원들의 총선 패배 우려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영국, 또다시 총리 교체 준비

스타머 총리는 후임 노동당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한다.

버넘이 단독 후보로 추대되면 이르면 7월 중순 총리직을 승계할 수 있다.

다른 후보가 출마하면 노동당 의원과 당원들이 참여하는 대표 선거가 진행될 수 있다.

이번 총리 교체는 단순한 노동당 지도부 변화뿐 아니라 영국의 장기적인 정치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기 총리는 저성장과 고물가, 이민, 공공서비스 악화, 재정 부담과 정치적 양극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떠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