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서 올해·내년 예산 위헌 결정

예산 위헌 결정으로 독일이 사상 초유의 예산 집행 올스톱 사태를 맞으면서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신호등(사회민주당·빨강, 자유민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립정부가 기로에 섰다.

야권에서는 조기총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연정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독일 정부는 23일(현지시간) 연방헌법재판소의 올해와 내년 예산 위헌 결정에 따른 후속조처로 올해 예산에 대해 헌법에 규정된 부채제동장치를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독일 헌법에 규정된 부채제동장치는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의 0.35%까지만 새로 부채를 조달할 수 있도록 제한한다.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지금은 시급한 현안을 가차 없이 처리하는 게 나의 임무"라면서 "전기·가스가격을 안정시키는 지출을 위해 헌법에 합치하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기금 등으로 돌린 특별예산을 본예산에 통합한 추가경정예산안을 내주 의결할 계획이다.

당초 독일 정부는 올해 예산에 대해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적용을 해제했던 부채제동장치를 재가동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헌재가 15일 독일 정부의 올해와 내년 예산이 헌법에 위배돼 무효라고 판단하면서 이같은 계획이 무산된 셈이다.

독일 신호등 연립정부 수장들

(독일 신호등 연립정부 수장들. 연합뉴스)

헌재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정부가 부채제동장치를 회피하기 위해 활용한 특별예산이다. 헌재는 지난해 코로나19 대응에 쓰이지 않은 600억 유로를 올해 기후변환기금(KTF)으로 전용한 것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독일 정부는 올해 KTF와 에너지가격 급등 대응 용도인 경제안정기금(WSF) 계정으로 지출하면서도 이를 부채제동장치 적용대상인 신규부채로 잡지 않고 코로나19로 이 장치가 해제됐던 전년도 부채로 기재했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가 올해 KTF나 WSF를 통한 지출로 생긴 부채를 특별예산이 아닌 본예산에 포함해 올해 부채로 기재하면 부채제동장치에서 규정한 한도를 한참 넘어서게 된다.

독일 정부는 부채제동장치를 적용하지 않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사후적으로 예산위기 상황을 선포할 예정이다. 선포 사유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이 될 전망이다.

독일 재무부는 헌재 결정 이후 전부처에 신규지출을 전면 중단을 요청하고 KTF는 물론 WSF를 통한 신규지출도 일제히 유보했다. 다만, 국방부의 신규 무기 확충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초유의 예산 올스톱 사태의 후폭풍으로 매일매일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당장 월 49유로(약 6만9천원)에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는 '도이칠란트 티켓' 가격이 오를 전망이고 독일 재건은행은 지원프로그램의 일부를 중단했다.

헌재가 역시 위헌이라고 결정한 내년 예산안도 당초 예정대로 내주 의결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예산으로 기재했던 지출들을 다시 본예산으로 복귀시키고 이로 인한 신규부채를 다시 추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내년에도 부채제동장치 적용을 제외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숄츠 총리에 대한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독일 야당인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은 총리가 내주 연방의회에서 해명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숄츠 총리가 소속된 사민당 내부에서도 숄츠 총리가 지금까지 '플랜B'가 없다는 데 대한 불만이 고조하고 있다.

정부 예산 올스톱이라는 부담을 안으면서도 헌재가 위헌 결정을 한 것은 정부 지출을 본예산이 아닌 특별회계나 기금, 장기 부수예산으로 넣는 예산운영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런 관행은 숄츠 총리가 부총리 겸 재무장관 시절 주도했다. 숄츠 총리는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생존이 걸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지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본예산이 아닌 특별재원을 활용했다.

이번 헌재 결정으로 숄츠 총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탄탄한 재정 운영을 기반으로 한 국정 운영에 타격을 입게 됐다.

독일 최대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연정이 재선거를 우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최대 야당인 기민·기사당 연합은 다음 총선이 예정된 2025년 말까지 기다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