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 EU가 자체 규제 완화에 나선 틈을 타 정책 영향력 확대 모색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요즘 유럽에 대해 좋은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미국의 주요 CEO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일 전했다.

WSJ에 따르면, 새롭게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은 유럽을 향해 이례적으로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EU
(유럽연합 EU 기. 자료화면 )

특히 유럽연합(EU)의 기업 규제를 "창의성과 생산성을 억누르는 규제 질식(regulatory suffocation)"이라고 규정하며 유럽의 경제적 쇠퇴는 지나치게 복잡한 규제 때문이라는 지적을 담았다. 해당 전략 문서는 금요일 공개된 이후 유럽 지도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EU의 머스크 벌금 조치가 갈등 확산

미국 내 반발은 최근 EU가 일론 머스크의 X(옛 트위터)에 1억4천만 달러 벌금을 부과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이 결정은 소셜미디어상에 폭풍을 일으켰고,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를 "외국 정부가 미국 기술 플랫폼과 미국 국민 전체를 공격한 것"이라며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월요일 "끔찍한 결정"이라며 벌금 부과에 불만을 표시했다. "유럽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한편 EU는 화요일 구글의 인공지능 서비스와 관련된 콘텐츠 사용 방식에 대해 별도의 반독점 조사를 개시했다. 구글 대변인은 이는 "혁신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고 반박했다.

미국 기업들의 불만 고조... "규제가 너무 많다"

엑손모빌, 헌츠맨, JP모건체이스, 포드 등 미국 주요 기업 CEO들은 최근 잇따라 EU의 규제 환경에 대해 공개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이들 기업이 유럽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EU는 4억5천만 소비자가 통합된 초대형 시장이며, 미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이자 해외직접투자(FDI) 최대 수요처이기 때문이다.

전략 문서 역시 "대서양 횡단 무역은 여전히 세계 경제와 미국 번영의 핵심 축"이라고 강조하며, 미국이 유럽을 포기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유럽이 쇠퇴한다, 문명적 몰락에 직면했다는 말들이 많지만, 여전히 미국 기업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장입니다."
- 제이컵 커크가드, 브뤼셀 싱크탱크 브뤼겔 선임연구원

EU "우리는 우리 길 간다"... 그러나 규제 완화는 이미 진행 중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트럼프 행정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규제를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EU는 자체 판단에 따라 규제를 결정한다"며 "경쟁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건설적으로 대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미국의 비판과는 별개로 EU는 이미 규제 완화에 착수한 상황이다.

화요일, EU 의회는 기업의 인권·환경 리포팅 의무를 완화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이는 기업의 행정 부담을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제이컵 커크가드는 "EU가 이미 규제를 줄이고 있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은 사실상 '열린 문을 밀고 들어가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드라기 보고서 이후 유럽 내부에서도 규제 완화 바람

유럽에서는 지난해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보고서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고서는 규제 간소화, 산업정책 강화 등을 권고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EU는 "느린 고통(slow agony)"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EU 집행위는 최근 규제 간소화를 위한 새로운 입법안을 내놓았고, 기업 단체들도 전반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분위기다.

다만 유럽 컨퍼런스보드의 마리아 데메르치스는 "간소화 필요성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일부 영역에서는 반발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후·디지털 규제부터 EV 전환까지... 미국 기업들의 불만 이어져

JP모건 CEO 제이미 다이먼은 최근 "EU는 단일시장 장벽 제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규제에 발목이 잡혔다"며 유럽의 경직된 규제가 투자·혁신을 유럽 밖으로 내몰았다고 지적했다.

포드 CEO 짐 팔리는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EU의 전기차(EV) 전환 규제가 지나치게 빠르고 비현실적"이라며 기업의 장기 투자 계획을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엑손모빌은 지속가능성 보고 규제 완화 조치가 "진전이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브뤼셀이 미국 기업의 전 세계 사업 운영을 규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할 수 없다"고 대변인은 말했다.

헌츠맨 CEO 피터 헌츠맨도 "EU는 단순히 규제를 줄이는 수준을 넘어 더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며 "유럽에서는 지금 대담한 아이디어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