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붐이 반도체와 관련 장비주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AI 하드웨어에 선제적으로 베팅한 헤지펀드들이 수십 년 만의 최고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4일 보도했다.
AI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기업뿐 아니라 칩 제조사, 메모리 업체, 반도체 장비업체,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업체까지 투자 열기가 번지면서 월가의 자금 흐름도 빠르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티브 코언(Steve Cohen)의 포인트72(Point72), 웨일록 캐피털 매니지먼트(Whale Rock Capital Management), 셀리그먼 인베스트먼츠(Seligman Investments) 등 주요 헤지펀드들은 지난 4월 반도체 및 AI 하드웨어 관련주의 급등에 힘입어 강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주식 선별형 헤지펀드는 4월 한 달간 6.5% 상승하며 1999년 12월 이후 최고의 월간 성과를 냈다. 기술주 중심 펀드 지수는 10.3% 올라 28년 데이터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AI 시대는 하드웨어의 황금기"
이번 랠리의 배경에는 AI 서비스 확산에 따른 막대한 연산 수요가 있다. AI 코딩 도구와 AI 에이전트의 빠른 보급으로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반도체, 고성능 AI 칩, 데이터센터 장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알파벳(Alphabet), 메타 플랫폼스(Meta Platforms), 아마존(Amazon) 등 빅테크 기업들은 올해 총 6,700억 달러 규모의 자본 지출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첨단 반도체가 들어가는 데이터센터 구축에 투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객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칩 가격은 상승하고, 공급업체와의 장기 계약도 확대되는 분위기다.
웨일록 캐피털의 알렉스 사세르도트(Alex Sacerdote)는 손 투자 콘퍼런스에서 "AI는 우리가 본 것 중 가장 많은 컴퓨팅 자원을 요구하는 분야이며, 공급 부족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는 하드웨어의 황금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기업들이 이제는 "황금 같은 훌륭한 비즈니스"가 됐다고 평가했다.
SK하이닉스·샌디스크·키옥시아가 수익 견인
AI 하드웨어 랠리는 특히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 큰 수혜를 안겼다. 웨일록의 상장주식 포트폴리오는 4월 약 39% 상승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샌디스크(Sandisk), SK하이닉스(SK Hynix), 일본 키옥시아홀딩스(Kioxia Holdings) 등이 주요 수익 기여 종목으로 꼽혔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급증의 대표적 수혜주로 부상했다. 앞서 삼성전자도 시가총액 1조 달러 클럽에 진입하며 AI 반도체 랠리의 상징적 사례가 됐다.
반도체 장비업체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셀리그먼 테크 스펙트럼 펀드는 4월 약 20% 상승했으며, 이는 2001년 펀드 출범 이후 최고의 월간 성과였다. 해당 펀드의 주요 보유 종목에는 브로드컴(Broadcom),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pplied Materials), 램리서치(Lam Research), 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업체 블룸에너지(Bloom Energy) 등이 포함됐다.
포인트72도 AI 펀드 성과 급등
스티브 코언의 포인트72 역시 AI 하드웨어 랠리의 수혜를 입었다. 포인트72의 대표 펀드는 4월 약 4.5% 상승해 5년여 만에 최고의 월간 성과를 기록했다. 코언이 포트폴리오 매니저 에릭 산체스(Eric Sanchez)와 함께 출시한 AI 중심 헤지펀드 투리온(Turion)은 같은 달 15% 상승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AI 투자가 단순히 엔비디아(Nvidia)나 빅테크 중심의 테마를 넘어, 메모리·장비·전력·데이터센터 인프라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헤지펀드 포트폴리오, 반도체 비중 10년 만에 최고
헤지펀드들의 반도체 비중도 급격히 커지고 있다.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에 따르면 헤지펀드 포트폴리오에서 반도체 업종의 순비중은 1년 전 5.5%에서 현재 20%로 높아졌다. 이는 최근 1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또한 지난달 상승 종목에서 나온 헤지펀드 수익의 약 3분의 2가 AI 공급망 관련 기업에서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같은 흐름은 5월에도 이어지고 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글로벌 헤지펀드 평균 수익률은 5월 들어 지난 목요일까지 약 1.4% 상승했으며, 은행은 고객들에게 헤지펀드들이 "광범위한 AI 테마에 대한 과도한 노출 덕분에 뜨거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 전쟁·인플레이션에도 AI 테마가 시장 압도
이번 성과가 더 주목되는 이유는 거시경제 환경이 우호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이란 전쟁, 소비자물가 상승, 인플레이션 기대 확대,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가능성 축소 등은 일반적으로 주식시장에 부담이 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AI 하드웨어 관련주는 이 같은 악재를 압도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AI 수요가 단기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설비투자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특히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수적인 반도체·장비·전력 인프라 기업들이 구조적 수혜를 받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반도체 사이클 리스크는 여전
다만 반도체 산업은 전통적으로 경기 순환성이 강한 업종이다. 공급 부족 시기에는 가격과 주가가 급등하지만, 이후 과잉 생산과 수요 둔화가 나타나면 급락하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에도 노트북, 스마트폰, 전자기기 수요 급증으로 반도체주가 크게 올랐지만, 이후 수요가 정상화되고 추가 증설 물량이 남아돌면서 업황은 빠르게 둔화됐다. 이번 AI 하드웨어 랠리 역시 장기 수요가 실제로 얼마나 지속될지, 빅테크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어느 시점에 조정될지에 따라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AI 랠리의 중심,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로 확장
이번 헤지펀드 성과는 AI 투자 흐름의 무게중심이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기업에서 하드웨어 공급망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모델과 서비스가 커질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칩, 더 큰 데이터센터, 더 강한 전력 인프라다.
그 결과 과거에는 경기 순환 업종으로만 평가받던 메모리 반도체와 장비업체들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헤지펀드들이 이 흐름에 대규모로 베팅하면서, AI 하드웨어는 월가에서 가장 뜨거운 투자 테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