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해외 뇌물수수 사건 수사를 중단시키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인도에서 뇌물을 지급하려 한 혐의로 기소된 코그니전트 테크놀로지 솔루션(Cognizant Technology Solutions)의 전직 임원 고든 코번과 스티븐 슈워츠는 기소 6년 만에 기사회생했다. 해당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새로운 수석 검사에 의해 두 달 만에 기각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4일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슈워츠 측 변호인 로렌스 러스트버그는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외국 뇌물, 공공 부패, 돈세탁, 암호화폐 시장 등 일부 화이트칼라 범죄 수사에서 한발 물러서고 있으며, 어떤 기업 행위가 범죄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정의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해 2월 트럼프 대통령은 "뇌물 수사는 미국 기업들의 해외 경쟁력을 해치며, 일부 지역에서 일상적인 관행으로 간주되는 행위를 처벌한다"고 주장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는 수십 건의 수사와 기소 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발언이다.
법무부는 마약 카르텔 및 국제 범죄 조직을 대상으로 돈세탁·대북 제재 회피 수사에 집중하라는 팸 본디 법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수사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피해자 없는 범죄는 기소 대상에서 제외
현 트럼프 행정부는 명백한 피해자가 없는 기업 범죄 기소에 소극적이며, 피고인이 정치적으로 표적이 되었다는 주장에도 열린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트럼프와의 정치적 인연도 수사 및 기소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 대변인은 "미국 시장과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 확보, 사기 및 낭비, 피해자 보상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며 "지능형 범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이 같은 기조 변화에 따라 일부 변호사들은 수사 중단을 요청하고 있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예측했던 암호화 기반 온라인 예측 시장 '폴리마켓(Polymarket)'에 대한 수사를 종결해 달라는 요청이 제기됐으며, 보잉(Boeing)은 737 맥스 기종의 두 건의 치명적 추락 사고 관련 유죄 합의안을 철회해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인도 재벌 고탐 아다니와 그의 기업 관계자들에 대한 해외 뇌물 혐의 사건 역시, 트럼프의 대외 정책 및 형사 정책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법무부에 기소 취소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다니 그룹 측은 "혐의는 근거 없다"고 반박했다.
2022년 해외 뇌물 및 시장 조작 혐의로 유죄를 인정한 스위스 소재의 원자재 거래 대기업 글렌코어(Glencore)는, 올해 법무부의 동의를 받아 1억 4천만 달러가 소요된 컴플라이언스 감시 프로그램을 조기 종료했다. 글렌코어 측은 미국에 전략 자원인 코발트를 공급하는 핵심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는 트럼프가 희토류 확보를 위한 행정명령을 내린 배경과도 연결된다.
정치적 표적 주장, 뉴욕 시장 기소도 취소
뉴욕 시장 에릭 아담스에 대한 기소가 기각된 것 역시, 대통령이 주장해온 '사법 시스템의 정치적 무기화'에 대한 대응 차원이었다는 분석이다. 해당 결정은 뉴욕 남부 연방검찰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려진 것으로, 전통적으로 화이트칼라 범죄 수사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뉴욕 남부지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뉴욕 남부지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몇몇 인물에게 사면권을 행사했다. 니콜라(Nikola) 창업자 트레버 밀턴은 트럭 기술 개발에 대해 허위 사실을 알리며 투자자를 속인 혐의로 유죄를 받았으나, 트럼프의 사면을 받았다.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멕스(BitMEX) 창립자 3명 역시 자금세탁방지 규정 미준수 혐의로 유죄를 인정했지만 대통령의 사면을 받았고, 기업 자체도 1억 달러의 벌금 납부 직전 사면됐다.
법무부 인사 교체, 수사 중단 가속
팸 본디 장관은 법무부 고위직 교체를 단행하며, 뇌물·담합·증권 사기 등 전통적인 화이트칼라 수사 책임자들을 교체하고 있다. 형사국 국장 대행은 에릭 아담스 사건 처리와 관련해 본디 측의 불만을 사고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외국 뇌물 수사를 총괄하던 사기 담당 국장은 이메일을 통해 교체 통보를 받았다.
뉴욕 남부지검에서는 여러 검사가 떠나거나 휴직에 들어갔고, 일부 기소 건은 새로운 연방검사가 임명될 때까지 보류된 상태다.
뉴저지 신임 연방검사로 임명된 트럼프 측근 알리나 하바는, 코그니전트 전 임원들의 인도 뇌물 혐의에 대한 기소를 취소했으며, 이는 해당 사건을 재판으로 넘기려 했던 검찰 내부 결정을 뒤엎은 것이다.
LA 연방검찰의 앤드루 위더혼 기소를 주도하던 검사 아담 슐라이퍼는 과거 반(反)트럼프 성향의 SNS 게시글이 문제돼 해고됐다. 위더혼은 햄버거 체인 'Fat Brands'의 CEO이자 공화당 기부자다.
"미래 수익 줄어들까 우려"...수임 축소 가능성 제기
전국의 연방검사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우선순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존 사건을 재편성하고 있으며, 고령자 대상 사기, 연방정부 계약 사기 등 우선순위에 맞는 수사로 자원을 돌리고 있다.
외국 뇌물 수사에 투입됐던 검사들 중 일부는 헬스케어 사기로 전환 중이다. 오피오이드 불법 처방, 메디케어 과다 청구 등은 트럼프 행정부가 우선시하는 분야로 꼽힌다.
SEC·CFTC도 수사 중단...암호화폐 기업 기소 취소
외국 뇌물 관련 수사에서 또 다른 역할을 해온 증권거래위원회(SEC)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외국부패방지법(FCPA) 담당 책임자와 부책임자는 대규모 명예퇴직을 통해 사임했으며, SEC는 관련 사건 처리 방식을 재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SEC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암호화폐 기업 규제의 핵심이었던 코인베이스, 크라켄, 커벌랜드 DRW에 대한 소송을 취소했고, 시장 조작 혐의로 기소된 암호화폐 사업가 저스틴 선 사건도 정지시켰다. 선은 트럼프 당선 이후 트럼프 일가가 운영하는 암호화폐 기업에 3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도 유사한 기조를 보이고 있다. 카롤린 팜 위원장 직무대행은 수사 중인 사건 3분의 1을 종료했으며, 30일간의 '집중 합의 기간'을 운영해 기록보관 및 보고 위반에 대한 다수 사건을 종결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변화는 현재 수임 중인 변호인들에게는 호재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업무 축소에 대한 우려도 크다. 베이커 앤 매킨지(Baker & McKenzie) 출신 전직 검사 밥 타룬은 "이런 유형의 수사에서 상당한 축소가 있을 것으로 법조계는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복잡한 해외 뇌물 수사는 변호사, 회계사, 기록관리 전문가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는 분야였으며, 사내 준법 감시 활동 역시 주요 수임원이었지만, 법무부는 지난달 컴플라이언스 모니터들에게 활동을 일시 중단하고 지속 필요성을 입증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다만 마약 카르텔 자금 세탁 등 일부 사례는 예외로 인정된다.